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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Sep 14. 2024

13. 왜 에서는 아닌가?

왜 야곱인가? 왜 에서는 아닌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갖게 되는 의문이다.


’왜 아브라함인가?‘. ‘왜 이삭인가?’라는 의문이 해결되는 지점에서 에서는 선택이 안되고 야곱은 선택된 결과가 더 큰 의문을 만든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선택하신 이유는 납득할만했다.

특히나 아버지 이삭의 선택됨은 그의 배다른 형제 이스마엘과의 사이에서 어떤 기준이 적용되어 결정됐는지가 너무나 분명해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이삭이 선택된 기준에 부합한다. 그럼에도 왜 에서는 안 됐고 야곱은 됐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삭이 선택된 이유는 하나님의 실존적 가치가 증명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낯선 신, 여호와라는 정체불명의 신이 약속하는 바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나 여호와는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증시킨 약속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반면 이삭의 배다른 형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성급한 마음에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증표였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께 간구해 태어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과물이다.


이뿐이 아니다. 그 외 여러 조건들을 비교해도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충분한 자격을 갖는다.

그중 하나가 이스마엘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즉 정식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아닌 경우였지만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정식 아내 리브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둘 다 출생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삭은 리브가 외에 다른 부인을 들인 적이 없어 이런 논란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둘은 쌍둥이, 출생과 관련한 모든 조건이 동일해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선택이 안 되는 일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출생신분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은 모두 4명의 여인을 통해 태어났으며 그중 둘은 정식 부인인 반면 둘은 그 정식 부인의 몸종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서 태어난 모두는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출생과 관련된 혈통적 조건이 중요하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고 그것이 중요치 않다 해도 두 명 중 에서는 선택되지 못했고 야곱만 선택된 결과는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그 사람 자체뿐.

에서와 야곱 중 에서는 선택되지 않고 야곱은 선택된 이유는 오로지 그들 자신의 문제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때문에 오늘 둘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전제가 맞다는 듯이 둘을 대비시켜 묘사한다.

태중에서부터 다투었다고 한다.

태어나는 순간에도 서로 먼저 나오려 다툰 것처럼 묘사한다.

태어난 이후에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에서는 힘을 쓰고 몸을 쓰는 일에 야곱보다 더 뛰어났다. 아마도 태중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전제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성경의 묘사는 태중에서부터 다투는 사이였고, 누가 먼저 세상에 나가 장자가 되는 것도 다투었다면 힘쓰는 에서가 먼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기 싫은 야곱은 나가려는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아 다시 태중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결국 힘에 못 이겨 나가는 에서에 딸려 나오게 된 것처럼 기록한다.


아무도 실제 태중의 아이들이 다투는 것과 태어나는 순간에도 먼저 나오려 다투고 잡아끌고 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럼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성경은 왜 기록했을까?

이 둘을 대비시켜 다름을 부각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마치 이 둘이 다른 것이 중요한 무엇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그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빌드업이랄까?

즉 확인할 수도 없는 태중의 모습까지 동원해 가며 그 둘을 비교하는 그 이유, 그것이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 중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한 기준을 말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창세기 25장 27절)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성경은 이 둘을 이렇게나 대놓고 비교한다.

일단 에서는 몸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야곱은 조용하고 주로 실내에 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이후 야곱이 팥죽을 쑤어 사냥하고 돌아와 몹시 배가 고픈 에서에게 팥죽과 장자의 권리를 바꾸는 사건이 나온다. 이때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장자의 권리를 야곱에게 가지라 말한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창세기 25장 32절 ~ 33절)


아마도 에서는 내가 준다고 야곱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니 일단 배고픔이나 면하자 하고 야곱의 요청에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을 수 있었겠다 싶다.

야곱도 에서가 장자의 권리를 준다는 말이 진실성이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맹세까지 하라 다그친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세기 25장 34절)


성경은 이런 에서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해 말한다.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따로 언급 하지는 않았지만 야곱은 ‘장자의 권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더라’라는 야곱에 대한 설명도 미루어 볼 수 있다.


사실 이 구절에서 그 이유가, 에서와 야곱 중 에서는 아니고 야곱을 선택한 그 선택의 기준이 명확해진다.

나머지 사건들은 그저 이 기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번 살펴보자.


이후 아버지 이삭은 나이 들고 눈이 어두워 지자 늦기 전에 후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거창한 의식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평소 사랑했던 장자 에서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일 뿐.

다만 이를 위해 이삭은 평소 자신이 좋아했던 에서가 사냥한 짐승으로 만든 음식 요청한다.


하지만 엄마 리브가는 에서가 아닌 야곱이 축복을 받기 원했다.

그래서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자신이 만든 고기 요리를 들려 보낸다. 이렇게 엄마의 도움으로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에서인 양 축복을 받는다.


이후 에서가 들어와 음식을 올리며 축복을 요청하자 아버지는 그제야 속은 것을 알게 됐지만 축복을 번복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에서에게는 축복울 빌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에 대한 에서의 반응은 처절하다.

축복이 그것뿐이겠냐며 다른 축복이라도 빌어달라 처절하게 청한다. 소리를 높여 울었다 한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세기 27장 38절)


그런 에서에게 이삭은 오히려 동생을 섬길 것이라며 저주를 한다.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세기 27장 39절 - 40절)


야곱은 아버지가 죽고 나면 야곱을 죽이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이 다짐도 공허했다.

한참 뒤지만 야곱이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의탁해 있다가 돌아올 때 에서는 다 잊은 듯 동생을 맞이한다.


밤새 생사를 건 싸움에 환도뼈를 다쳐 불쌍한 모습에 측은했던 것일까?

아니면 엄청난 재물을 받고 맘이 풀어졌던 것일까?


여하튼 에서는 과거의 억울함과 분함은 잊었다.

자신의 재산을 받으라 권하는 야곱에게 자기도 가진 것이 풍족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아버지의 축복이 없어도 살만 하니 그까짓 축복 별거 아니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에서의 진지하지 못함은 그의 결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에서가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죽이려 마음먹자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피신시킬 궁리를 한다.

자기의 오빠, 야곱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라반에게 보내어 에서의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지내게 하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에서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엄마 리브가도 에서의 성품을 알고 있어 분함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창세기 27장 43절 ~ 44절)


이를 위해 리브가는 야곱의 결혼이라는 이유를 만든다.

야곱을 에서와 같이 가나안 헷족속의 여자와 혼인시킬 수 없다는 것.

아마 이때도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맘에 들기 어려웠던 것 같다.

리브가는 에서의 결혼을 거론하며 헷사람의 딸들로 내 삶이 싫어졌다 말한다.

때문에 야곱은 동족의 여자와 결혼시켜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촌에게 보내겠다고 이삭에게 허락을 받는다.


이 대강의 스토리에서 에서는 이미 결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과 한 것 같다.

리브가는 ’헷사람의 딸들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서는 순간적인 끌림에 즉흥적으로 결혼을 해버린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과…


그러다가 야곱을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 외삼촌 라반에게 보내려 한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결혼한 헷족속의 여인을 부모가 맘에 안 들어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에서가 한 일이 동족과 결혼을 하면 부모님의 마음이 풀어져 내게도 축복을 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해 또 다른 여인을 아내로 데려온다.

그런데 이스마엘의 딸이다.

친삼촌이자 아버지 이삭의 배다른 형인 이스마엘의 딸.


그런데 이스마엘이 누구인가?

어려서 아버지 이삭을 괴롭게 하고, 결국엔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쫓겨난 혈육이다. 이럴 경우 오히려 더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일반적이다.

자신도 친형제지만 야곱을 싫어하고 시기하는데 아버지 이삭이 이스마엘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자의 딸을 친족이라 데려와 결혼하고 부모의 마음이 풀어지길 바라고 있다.


에서는 그런 자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하는 성향이 아니다. 즉흥적이고 그때 좋으면 다른 것들은 상관없는 그런 사람.

자신의 마음은 헤아릴 줄 알아도 다른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이고, 의미를 찾고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 보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마음에 두고 간직하며 그것을 대대손손 이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민족과 나라를 만들기 원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고, 이삭에게 약속했던 그 축복을 이제는 한 단계 더 진전시켜야 하는 시점이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조건은 혈통이 아니라 그 뜻을 담아낼 수 있는 성품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서는 선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그럴만한 사람이었을까?

야곱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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