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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Sep 21. 2024

14. 왜 야곱인가?

지난 글에 에서는 왜 안 됐던 것인지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는 매사가 가벼웠다.

외모야 붉은 털이 수북하고 커다란 덩치에 힘을 쓰는 모습이라 절대 가볍다 생각할 수 없지만, 이런 그를 가볍다 평가하는 이유는 생각 없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본질적으로 좋은지 생각함이 없고 이런 부분에서 생각이 없으니 무엇인가를 바라며 지향하며 노력해 추구하는 것이 없다.


늘 즉흥적이다. 항상 그 순간의 좋음을 따라 살며 만족하지 않은 상황에는 불같이 감정을 폭파시킨다.


하나님은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쌓고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향하는 분명한 가치가 있고 그것을 위해 지속적으로 애쓰고 수고하는 노력함이 필요하다. 그 노력함에는 원하지 않지만 감래 해야 함도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하나님조차도 에덴의 사건과 노아시대의 홍수, 바벨탑 사건을 겪으셨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시킬 방법을 찾아 새롭게 시도하며 이루시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겪고 계시는 중이시다.


이를 위해 새롭게 계획하신 것이 특정한 사람을 선택해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가르치시고 삶의 문제를 통해 경험케 하시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가신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아브라함이, 이삭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에서는 선택될 수 없었다.

늘 현재만을 사는 그에게 지속적인 노력함과 본성이 원하지 않는 일까지도 감래함으로 얻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가?

야곱은 그럴 만 한가?


일반적으로 야곱을 교활하고 꾀가 많은 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냥으로 허기진 형 에서의 상태를 교묘하게 이용해 장자의 권리를 얻는다.


형 에서인 양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에서를 마주하기 두려워 자신의 재산과 무리를 여러 떼로 나누고 4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오는 에서에게 순차적으로 보내어 에서의 심기를 누그러뜨리려는 계획도 세운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창세기 32장 20절)


그 계획 속에 자신과 가족은 마지막에 두어 에서의 반응을 살펴 여의치 않으면 도망가 생명을 보전할 심산이 엿보인다.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창세기 32장 8절)


그랬다. 그는 꾀가 많았다.

하지만 야곱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위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표면만을 본 결과지 싶다.


야곱은 원하는 바가 있었다. 지향점, 또는 추구하는 바가 항상 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실행한다.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것을 실행해 이루어내는 능력 말이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내재된다면 어떻게 될까?

야곱의 이런 점이 하나님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신 중요 이유 중 하나라 생각된다.


야곱의 꾀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야곱은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위해 꾀를 써 반드시 얻어내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제대로 값을 치르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에게 갔지만 그곳에서 야곱은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삼촌 라반의 딸이자 자신과는 외사촌 여동생 라헬이다.

한 달간 라반의 집에 머물며 야곱은 무위도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열심히 삼촌 라반의 일을 도왔고 또 라반은 야곱의 얼마나 열심히 일했던지 그 수고함을 그냥 넘기지 않고 일한 대가를 지불하겠다 한다. 잠깐 지나가듯 이야기된 부분이고 그저 야곱의 성실한 됨됨이를 볼 수 있었던 부분이라는 정도로 언급하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야곱의 됨됨이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다른 것이 보인다.

대가를 요구하는 삼촌에게 야곱이 요구한 것이 라헬이기 때문이다. 물론 야곱의 성실한 됨됨이도 볼 수 있었지만 라헬을 얻기 위한 치밀함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라헬을 위해 7년이라는 긴 시간을 삼촌을 위해 일하겠다고 제안한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딸을 그냥 달라고 했어도 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동생 리브가를 이삭에게 보내는 과정도 그러했었다.

아브라함이 종을 통해 요청했고 그 청을 받아들여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 한 달 일하는 것을 보아 거저 일 시키기에 미안할 정도로 성실하게 지혜롭게 일함을 목격한 라반으로써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정도가 아니라 거절하면 안 되는 오히려 쾌재를 부를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야곱의 비상함도 목격하지만 그래도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라헬을 위해 감래 하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잘 아는 이야기지만 7년 뒤 삼촌 라반의 계략으로 라헬대신 언니 레아를 먼저 처로 맞이한 야곱은 다시 7년을 더 일할 것을 약속하고 7일 뒤 라헬을 아내로 맞이한다.

14년이다. 잠시 라헬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큰 것을 감수하는 야곱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싶고,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나 크게 봐주는 것에 여자로서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큰 것을 감수했지만 삼촌 라반도, 그의 두 딸도, 그리고 당사자인 야곱까지 원하는 것을 얻은, 모두가 만족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원하는 것을 위해 감수할 줄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하나님의 나라는 가만히 있는다고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전지 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이름에 어울릴 수 없는 실패도 감수하신다.

인간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게 해 동참시키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도 감수하셨다. 인간들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라기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골방에서 믿는다 고백하고 기도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향하고 행동해야 하고 그 가운데 분명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과 고단함을 감수해 내야 이루어질 수 있는 매우 고귀한 최상의 가치라는 것이다. 그 가치가 큰 만큼 감수하고 감래 해야 할 것들의 크기도 커질 수밖에 없다.

야곱은 그것을 알았고, 에서는 되는대로 살았다.

이것이 야곱이 선택된 이유라기보다, 이쯤 되면 야곱은 선택되어야 마땅했다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한 가지 더 야곱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은 두려움을 극복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물론 두려움을 극복이라 말하지 않고 두려움도 감수했다 말하고 직전에 한 이야기 속에 함께 다루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감수함과 극복함은 다르게 다루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점점 커진다.


감수함이란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고단하지만, 수고스럽지만 그럼에도 해내는 것이라면 극복이란 현재의 나를 뛰어넘어 다른 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곱이 극복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두렵지만 해야 하기에 그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야곱은 어떤 사건에서 두려워했고 그럼에도 해냈는가?


먼저는 아버지의 축복을 에서대신 받는 사건에서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창세기 27장 12절)


야곱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축복을 사모함이 큰 만큼 잘못되어 저주를 받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에 두려움도 컸다.

축복을 받지 못하면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야곱은 잘못되어 받게 될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 앞에 나아간다.

물론 온몸에 염소털이 풍성한 가죽을 뒤집어쓰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은 축복을 받아낸다.

야곱에게는 그저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야곱은 분명 축복을 받아낸 것이다.


또 한 번은 삼촌 라반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이다.

이미 이룬 것이 많고 지킬 것이 많았기 때문일까?

야곱은 형 에서의 보복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창세기 32장 7절)


이 정도로 두려웠으면 돌아가지 않음 될 일이었다. 삼촌에게서 얻은 자신을 몫과 아내들과 자녀들과 정착해 살아도 됐다.

라반도 함께 살 것을 권유했었다.


그런데 왜 야곱은 그런 두려움을 마주하면서도 기어이 돌아갔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야곱은 형에서의 위협이 두려워 집을 떠났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이후부터 하나님은 야곱의 삶의 중요 순간마다 니타나시고 말씀하신다.


집을 떠나던 날도 그랬다.

들판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자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8장 13절 ~ 15절)


나타나셨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하신 축복을 야곱에게도 하신다.

이 땅을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는 축복이다.

더불어 지키겠다 하시고 마침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 약속하셨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세기 28장 / 20장 ~ 22장)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에게는 물에 빠져 잡는다는 지푸라기와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이것이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 말이다.

해서 야곱도 하나님께 조건을 건다.

정말 나를 지키시고 살려 다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과 돌을 세워 증표를 세운 이 자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다 한다.


시건방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인간 주제에 어디 하나님께 조건을 거는가 말이다.

그리고 보면 에서에게 장자의 권리를 살 때와 똑같다.

준다 했지만 믿지 못하고 거듭확인하고 맹세까지 시키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함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통 하나님을 처음 대하는 자들의 태도가 이렇다.

‘내게 무언가를 해 주시면 믿어 보겠습니다.’ 또는 ‘나도 무언가를 해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만 알았던 하나님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야곱은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야곱에게도 오랜 시간 많은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시고 개입하시며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시키시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하신다.


이제는 건사할 식솔이 많아져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이것저것 준비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또 나타나신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세기 31장 12절 ~ 13절)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하시던 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지칭하지 않으시고 야곱의 서원에 기인해 벧엘의 하나님이라 하신다.

그날의 건방지고 시덥지 않은 태도였지만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셨고 오히려 야곱에 맞추어 한걸음 더 다가가신다. 그때의 약속을 상기시키시고 담대히 출발하라 하신다.


우여곡절 끝에 삼촌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곳에 이르렀다. 이번엔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세기 32장 9절 ~ 12절)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에게 계속 돌아갈 것을 강요하시듯 요구하셨고 결국 야곱은 그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고향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많이 두려웠다.


그러나 야곱은 두려워만 하고 있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살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그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먼저는 혹시나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싶어 형에게 보낼 선물, 자신의 재산을 세등분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야곱에게 보낼 계획을 세운다.

아마도 무리와 가축의 떼를 만날 때마다 야곱이 자신에게 바치는 것을 알게 된 후 에서는 다음무리를 기대하며 얼마나 더 있을까 바라는 맘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적개심이 기대함으로 반가움이 되는 것이다. 고도로 계산된 심리전이다.

놀랐던 부분은 재물만 보낸 것이 아니라 전할 말까지도 치밀하게 생각해 전했다는 점이다.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자신을 종이라 하고 형 에서를 주라 칭한다. 그 사용한 워딩을 보면 정말 철저하게? 아니 처절하게 계산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다.

여전한 두려움으로 보아 야곱이 하나님을 완벽히 신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렵지만 하나님을 의지해 극복하고 나갔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저 스스로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중에 하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고 평안하지 못했음은 하나님을 붙잡고 밤새 씨름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창세기 32장 24절 ~ 28절)


정말 많이 들었던 목사님들의 설교 본문인데 야곱의 전반적인 부분을 살피고 다시 보니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

내가 다시 느끼는 것은 야곱은 정말 뭐든지 하고, 뭐라도 하는 사람이구나 싶은 것이다.

결국 그 뭐라도 하고 뭐든지 하는 야곱은 하나님마저도 이겨내고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야 만다.


이 싸움은 절박한 야곱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뭐라도 한다는 생각으로 했겠다 싶어 충분히 납득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야곱과 싸워 씨름할 필요는 무엇이었을까 생각게 된다.

야곱은 스스로 해야 할 바를 다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최선의 노력함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하고도 불안해 떨고 있는 야곱. 환도뼈가 꺾인 상태에서도 상대를 놓아주지 않는다.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 달려든다. 자신과 가족의 생사를 이 싸움에 걸었다.

야곱은 처절한 매달림 속에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후에도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스스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은 여러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닌 야곱을 지키실 절대적인 단 하나의 방법임을 절감케 하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공백이 느껴진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상황 때문이다. 여전히 형에서는 다가오고 있고 그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화해할 것이라는 조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자신에게 거의 다 다다른 형 에서를 마주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스라엘이라 칭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야곱이 자신을 이스라엘이라 칭하신 그 이름의 뜻을 믿고 담대하게 에서를 맞이하러 나갔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석연치 않다.

아마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마주한 형은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가족들을 둘러본다.


살았다!


아마도 이제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창세기 32장 20절)


엘엘로헤이스라엘(אֵל אֱלֹהֵי יִשְׂרָאֵל)은 히브리어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뜻한다.

직역하면 ‘사람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최상급의 최상급 같은 느낌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라까지 나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야곱은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인 이스라엘로 자신을 지칭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


야곱은 기어이 생명을 보존받고 축복을 누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어이 야곱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셨다.


야곱의 그 ’기어이‘가 하나님이 야곱을 자신의 사람으로 ‘기어이’ 만드셔야 하는 이유였다.


원하는 바를 정해 그것을 위해 뭐라도 하고 뭐든지 하는 그런 성품 말이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심기워 민족을 이룰 12명의 자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 이어 야곱이 맞이한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달되고 나타날지는 지켜볼 일이다.




P.S

한 가지 에서와 야곱의 스토리에서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자식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죠.

이삭과 똑같이 쌍둥이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이들의 스토리를 살피고 각 등장인물을 묵상하는 동안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삭에게는 장자에게 거는 기대함에 에서를 더 사랑했다 말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덩치도 크고 사냥도 잘해 주변 어느 부족의 누구와도 싸워 능히 이길 것 같은, 그래서 가족을 지켜낼 것만 같은 그런 듬직함입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왜 에서의 축복을 대신 받게 할 만큼 야곱을 편애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야곱이 에서와는 너무나 다르게 유약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서가 들로 산으로 누비며 사냥을 하는 동안 야곱은 주로 집안에만 거했고 어머니의 가사를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 야곱을 보면서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걱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싶은…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에게 더 필요하다 생각했겠다 싶은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힘으로도 충분히 생명을 보존하며 살아갈 수 있겠다 싶었고, 야곱은 하나님의 지키심이 아니면 살아가기 어렵다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죠.

궁금했던 부분이 나름 납득이 되어 첨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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