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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Aug 17. 2024

09. 홍수심판의 부작용, 바벨탑

바벨탑, 창세기 노아시대의 홍수심판 이후 첫 사건이다.

대홍수가 인간들의 일상화된 죄악으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판단해 모든 사람을 멸한 후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로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들어 가시려는 계획임을 생각할 때, 바벨탑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아니 단순한 실패를 넘어 오히려 그 죄악 됨이 발전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바벨탑 사건으로 비롯한 홍수 심판의 심각한 부작용 두 가지, 즉 인간이 죄를 향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했다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겠다는 것보다는 그저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타락 이후 노아시대까지의 사람들의 죄악상도 홍수로 인간을 모두 멸절시킬 정도로 심각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이 없어 그 죄악 됨이 어떠했는지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상대를 아무렇지 않게 죽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모두 자신의 옳은 대로 판단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은 예사로 일어나는 그런 무시무시한 시대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대상이 사람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벨탑 시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일들에서의 죄악 됨을 넘어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세기 11장 4절)


이들은 탑을 건설하자 이야기하며 ‘우리의 이름을 내자’한다.

이름을 만드는 것은 창조자의 고유한 권한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사람이라 칭하신 것은 직접 만드셨기에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도 각 시대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면 그것의 이름은 그 만든 사람이 그 창조물의 쓰임새와 목적을 생각해 이름을 부여한다.

자녀가 태어나면 그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미찬가지의 이유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 주라고 사람에게 시키신 것은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로 생각지 않으셨고 창조사역의 동역자, 파트너로 지으셨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름을 짓는 것은 누가 주인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낸다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묻는 자에게 스스로 있는 자로 스스로를 정의하시고 소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내가 나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행위고 이제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대적해 싸워 이기고 살아남겠다는 선언이다.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탑을 쌓으려는 것은 홍수 심판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하나님이 온 지구를 물로 뒤덮어 차오르게 하신데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 스스로 생명을 지키려는 방어적이고 대항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시도인 것.

설사 그 심판이 홍수가 아니어도 높이 쌓아 올린 탑을 중심으로 모여 함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때를 대비함이 목적이다.


홍수 심판으로 노아와 그 가족만 남고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는 것임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바라심을 따르는 것이 정상일 텐데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직접적으로 대적하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님을 그들의 주적으로 삼은 것 같은 느낌이다.

적어도 홍수 때처럼 가만히 앉아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연합한다는 점이다.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온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다시 말해 ‘함께하자’ 결의한다.


소름 돋는 부분이다.


홍수 이전까지는 그저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살기 위한 죄악이었다면 하나님이 모두를 벌하시고 죽이심을 겪은 후 살기 위해 맞서야 할 상대가 하나님으로 바뀌었고 그 하나님과 맞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연합해 생각과 힘을 합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까?


연합함은 축복이었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과 사람이 연합함으로 온전함을 이루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었다. 그 복된 연합에서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는 단연코 하나님과의 연합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서로 생각을 모아 뜻을 세우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이용해 그 뜻을 실현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연합함으로 세운 뜻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구조화해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것이 바벨탑의 실체이다.


기본적으로 건축물의 지어짐은 방어와 보호의 목적이 크다.

더위와 추위 등 기후적인 문제 및, 맹수와 나를 해하려는 누군가에서부터 스스로를 지켜 안전하게 먹고 마시며 잠을 잘 수 있는 환경을 추구한 결과다. 여기에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더해진다.


그다음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그 크기와 구조를 보며 과거 어떤 기술을 보유했기에 가능했을까 싶은 경이로움과 궁금함도 크지만, 그보다 이것을 지으려 동원된 많은 사람과 그들의 고생스러움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왜 그런 고생스러움을 감수하며 이런 거대 건축물을 짓는데 동원되어야 했는지’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자신의 안전과 안락함을 위한 최소한의 수고로움은 누구나 감당할 수 있고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 이조차도 안 하면 언제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생존에 치명적인 상황이라 딱 그 수준까지의 고됨은 누구나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피라미드나 그보다 더 거대해 마치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은 그 고됨의 정도가 지나치다. 아니, 지나치다 못해 가혹하다. 왜 이런 지나치게 가혹한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했을까?

아마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억압된 상황이기에 마지못해 그 고됨을 감수하는 것일 테다.

무엇일까?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란?


웃프게도 이런 건축물이 가능한 직접적인 배경엔 이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 전혀 고생스럽지 않은 누군가가 존재해야 가능하다.

아마도 모두가 이 건축을 위해 똑같이 가혹한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모두는 서로 합의 하에 그 건축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그런 건축물 짓는 것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런 건축물은 자신은 전혀 수고롭지 않으면서 지시만으로 그 수고로움을 누군가에게 전가해 감당케 할 만한 절대적인 힘이 작용해야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힘이다. 정확히는 권력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거대한 건축물은 권력의 생성과 일치해 만들어진다.

권력의 크기가 클수록 건축물의 크기도 비례해 커진다.


그렇다면 권력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모든 사람이 동등한 지위라면 그 가운데 우위를 점하는 요인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가령 노아 이후의 연대를 기록한 것에서 니므롯에 대해 ‘용사요 용감한 사냥꾼’이라 묘사한다. 그만큼 압도적인 피지컬로 짐승을 제압하고 사람도 제압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엔 그가 나라도 이루었다 기록하며 그 시작된 곳이 시날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창세기 10장 9절, 10절)


그리고 바벨탑이 건축되기 위해 사람이 모인 곳도 시날이라 한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장 2절 ~ 4절)


아마도 이런 기록에 근거해 바벨탑 건축을 주도한 사람으로 니므롯이 지목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그 어떤 개인이라도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은 자연스럽게 권력으로 발전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런 압도적인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명이 의도적으로 연합함으로 힘의 크기를 키우는 경우도 있다.

연합함으로 힘을 키워 그 효과를 본 인간들은 더 큰 힘을 추구하며 더 많은 사람을 참여하게 한다.


여하튼 이런 힘이 있거나 힘이 조직이 되고 나면 그 힘을 이용해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이때 그 힘을 이용한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 이를 ‘권력에 부역한다’ 말하는 것일 테다.

이렇게 권력에 부역하는 사람들은 그 힘을 이용해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그것으로 그 힘의 중심에 있는 권력자에게 바치고 자신의 이익도 채우는 단단한 공생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공생관계는 아래로 점점 커져가며 나중에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형성하게 되고 그 피라미드의 최 상위, 권력의 정점에 선 자는 마치 하나님도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고대의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신격화한 데는 이런 과정에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또는 권력에 부역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그 정점에 있는 자를 신으로 추앙해 깨지지 않는 권력 구조를 만들고 영원히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그 권력은 거대한 건축물로 그 힘을 과시해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힘의 도전을 방지한다.


그리고 그들이 연합해 처음으로 스스로를 지켜 방어할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인간은 홍수심판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 초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탑을 쌓아 피할 방도를 만들어 놓고 ‘어디 한번 더 우리를 심판해 보라’는 것처럼 힘을 합쳐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늘까지 닿는 높은 곳에 닿아 온천하에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모든 일들이 의인이라 선택받은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더 충격적이다.


하나님도 당황하셨던 것 같다.

직접 내려오셔서 그들이 쌓아 올리는 탑을 살펴보신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세기 11장 5절)


하나님도 이런 도전이 가능한 이유를 그들의 연합함으로 보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1장 6절, 7절)


하나님이 급하게 조치한 방법은 그들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해 의사소통이 어렵게 만드신 것이다.

연합함에 있어서 그 뜻을 일치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고 그 뜻이 일치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수없이 많은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이뿐인가? 이렇게 고도의 협력이 필요한 일에 원활한 의사소통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벽돌을 달라는데 물을 주고, 역청을 바르라는데 무슨 말인지를 몰라 내다 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 어떤 일도 진척되기 어려운 것은 명백하다.


때문에 일의 성격을 보면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은 적절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도 당황하셔서 급하게 처리한듯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연합함은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기본 원리였다는 것이다.

물론 죄로 인해 하나님과도 금이갔고, 다스리라 맡겨주신 피조세계와도 금이갔으며, 가장 기본적으로 연합해야 할 부부, 자녀의 관계를 포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긴 것은 맞다.

하지만 원활한 의사소통은 다시 연합함에 필수적인 조건 아닌가?

원래 의도하신 상태로의 회복을 염두한다면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신 것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조치였다.

그만큼 하나님도 죄을 전제로 연합해 하나님께 맞서며 더 큰 죄악으로 나가는 것만큼은 막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신 것이리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연합합은 지속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위는 낮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고도화되어 갔다. 더불어 인간들끼리 반목하는 것도 개인대 개인의 반목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더 큰 힘을 추구하며 더 깊게 대립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관계는 악화되었다.

바벨탑에 대한 해결책 역시도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은 다급함에 이루어진 악수라 생각된다.


이렇게 인간은 연합해 하나님과 맞선 대가로 서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완벽한 분리를 초래한다.

언어가 혼잡케 되고, 사방에 흩어져 분리된 이 상황을 보며 이와는 정반대의 일이 펼쳐진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며 성령을 기다리라고 한 예수의 명령에 순종했던 제자들의 이야기다.

오순절 모여 기도하는 중 성령의 강림과 함께 나타난 현상, 제자들이 온 세계의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하게 된 것이다. 즉 어느 나라 누구와도 다시 자연스럽게 소통하게 된 그 사건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장 1절 ~ 4절)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7절 ~ 13절)


연합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을 언어를 혼잡하게 해 소통하지 못하고 흩어 함께 하지 못하게 하신 이 사건은 오순절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해 다시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고, 이를 시작으로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 다시 연합할 수 있게 되는 사건과 완벽한 대비를 이루며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그리고 언어를 혼잡케하시고 온지면에 흩은 일은 반드시 다시 복구시켜야 할 중요한 일이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다급한 악수였음도 확인한다.


인간은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

이렇게 죄악 된 인간을 멸절하고 의인 노아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시려던 하나님의 계획은 또 실패했다.

그냥 실패가 아니라 이전 계획에 대한 내성까지 갖추고 죄를 발전시켜 나가는 부작용까지 초래했다.

심지어 그 부작용으로 다급한 마음에 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 악수를 두신다.


이전글에서 하나님의 실패하심에 대해 그 이유와 의미를 정리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실패와 부작용을 이야기하고, 악수라고까지 표현해 언급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외면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바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불편한 이유가 이미 나의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바람과 이미지가 고착되어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춰 규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저 그 불편함을 마주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온전히 알아가길 바랄 뿐이다.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조금 더 알게 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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