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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Aug 10. 2024

08. 하나님의 후회하심.
실패를 감수하시는 이유

하나님은 왜 실패하시는가?

아니 하나님은 왜 이런 오해를 사면서 까지 실패를 기꺼이 감수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단 하나의 실마리는 인간에게 있다.

그 실마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친히 인간을 만드셨지만 인간을 단지 다스려야 할 피조물로만 여기지 않으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하심과 그로 인한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사역의 동역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8절)


인간을 동역자로 만드시기로 계획하셨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기로 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장 26절)


이렇게 인간에게 창조하신 모든 것에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이를 위해서였는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는 방법만 매우 특별하다. 다른 피조물과 같이 명령으로 하지 않으시고 손수 지으셨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장 7절)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다. 특별한 피조물이다.

그 특별함은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신분이며, 이를 위한 창조의 과정도 특별해 그 모델이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셨고, 손수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만드셨다 선언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필요에 의해 무엇인가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상황과 환경에 매몰되어 사라지지 않고 극복하며 방법을 만들어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결과를 기대하며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은 계획을 세워 성공을 지향하는 것도 어쩌면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방법으로 새롭게 시도하시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과 하나님께서 실패를 감수하시는 것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을 여타 피조물과는 다르게 동역자, 파트너로 여기시는 것에 이유가 있다.


동약자, 파트너, 이 말들이 갖는 관계의 대등함이 하나님과 인간에게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한계를 무시하시고 인간을 하나님과 대등한 수준의 존재로 인정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세기 2장 19절)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창조자 또는 주인의 고유한 권한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기도 전에 생각하시고 만들어 사람이라 칭하셨다. 직접 생각하시고 만드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각 시대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개발될 때마다 그것의 이름은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그것의 쓰임새와 목적등을 고려해 이름을 지었다.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렇게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주인과 소유의 관계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데려오시고 사람에게 이름을 지으라 하신다.

사람이 그 모든 것의 주인 되어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도록 동역자, 파트너로 대우해 주시겠다 하신 것.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대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인간을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령을 부여하신 것이다.


왜 대등한 존재로 여기셨을까?


여러 가지 신학적 논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글이 신학을 논하는 글도 아니고, 필자가 그럴 능력도 안되기에 신학적 접근은 삼가겠다.(솔직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글의 취지가 일반적인 성도의 관점에서도 성경을 이해해 보자는 것임으로 신학적 주장들을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거론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의 것들로는 거론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 힘의 논리에 의한 종속적이고 강압적인 관계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왜 하나님 선악과를 만드셔서 그것을 따먹을 여지를 두셨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만 하게 하시지 왜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마음을 주셨고 에덴에서 쫓겨날 가능성을 열어 두셨을까를 궁금해했더랬다.

그리고 마침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인간의 삶은 고통자체가 되어버린 것을 생각하며 만들지 말고 주시지 말 것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 책임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 이유도 모른 채 지시를 따르는 것, 혹은 하기 싫고, 심지어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도 강력한 힘에 의해 굴복되어 마지못해 복종하듯 하는 일에서 어떤 의미와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없다.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고,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지시하는 것에 마치 잘 짜인 프로그램처럼 작동하는 세상, 전지전능하신 초월적 능력으로 통제되는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뜻에 공감하고 동의하며 그로 인한 자발적인 참여로 함께하길 바라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철저히 반대된다는 것에 있다.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인간의 본능도 동일하게 원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미 논쟁거리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선으로만 창조되었다면 그래서 선함만을 추구하도록 기본값이 세팅되어 있다면 앞서 서술한 의미 없는 복종과 무엇이 다른가?

때문에 인간이 자유롭게 스스로의 의지를 표출하며 원하는 바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유의지란 선택의 폭이 있을 때에만 발휘될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주어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른바 자유의지라는 것을 갖고 하나님의 선을 쫓아 무엇이 더 옳은지를 기준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쫓아 무엇이 더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에덴에서의 선악과는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기대하시는 바에 공감하며 그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지를 나타내는 시금석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로 선택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힘에 맹목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실 나라가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하신 선악과를 따먹었 듯이 얼마든지 이삭을 바치는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 역시 그 세세한 조항들로 백성의 생각과 행동을 옥죄어 통제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에 대한 의미를 내포해 그 뜻을 이해하며 살아가는지를 판단하는 가늠자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선택을 했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신다.

단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갖고 끊임없이 인간을 설득해 자원하여 동참하길 바라실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실패를 감수하시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실행하신 방법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에덴이 그랬고 노아의 홍수가 그랬으며, 바벨탑 사건이 그랬다. 그리고 선택한 소수를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온 천하게 나타내고 그 영광스러운 나라로 모든 나라가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그 원대했던 계획인 이스라엘도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의 실패는 인간의 무지함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패는 그렇게 무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욕심을 따라 죄악을 선택하는 인간을 감수하시는 것이며, 설득하는 과정이고,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기다림이다. 그리고 반듯이 하나님의 뜻에 참여시키시겠다는 의지이다.


하나님은 실패하시지만, 때로는 후회도 하시지만, 매번 새로운 방법으로 새롭게 시작하신다.

아담과 하와에서 노아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예수로, 하나님은 그렇게 방법을 달리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설득하시고 초대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열심히 있고, 성실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이 옳음을 믿으며, 그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기로 자원하는 사람들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길 원하신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실패를 감수하신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때문에 그 나라는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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