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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Oct 19. 2024

18. 요셉 2. 노예가, 죄수가 형통이라고?

요셉의 스토리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무엇일까 다시 정리해 본다.

악을 행했던 야곱의 대부분의 아들들, 그리고 선을 행했던 요셉, 그 둘을 대비시켜 현재의 유익을 쫓아 악을 행함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유익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적 개입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지적 개입하심이라 한 이유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마침내는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로 계획하셨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을 선택해 관계를 맺는 것부터 시작해 대를 이어가시며 단계적으로 가르치시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들어가시는 과정이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로 어느 정도는 그 실체가 나타나야 하는데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다. 서슴없이 악을 행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실 필요가 있었다.

이전 홍수나 바벨탑 사건과 같이 심판의 형식이 아닌 가르침을 통해 깨닫는 자리로 인도하길 원하셨다.

그렇게 악을 행해 당장의 유익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그 악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자신의 반대편에서 선을 행했지만 팔려가고, 종이 된 요셉을 결국 애굽의 총리로 만드셔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면 요셉과 같은 축복을 주겠다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렇게 단정 지어 생각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대응하시며 알려주시는 바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각각 다르게 대응하셨던 단계적 가르침의 다음단계일 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바는 아직 아니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요셉에 이르기까지 알려주신 것이 축복을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과 훈련하심이었다면 요셉을 통해서는 한 가지 더, 그 축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원하신다는 것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항상 형통케 하셨다는 요셉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다면 팔리는 일도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함도 아닌 아버지 야곱의 집에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다면 옥에 갇히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아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형통케 하심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함께하심을, 형통케 하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원래 알게 하고 싶으셨던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는 것.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내 생각이 틀렸길 바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질문과 만난다.

‘우리의 원함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원함은 무엇인가 ‘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원함을 살펴보자.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잘못도 용납하시며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에 이르러 다른 대응을 하신다.

현재 노예의 신분인데 함께하셔 형통케 하셨다 하신다. 현재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인데도 함께하셔 형통케 하신 것이라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의 잘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한 결과로 노예가, 죄수가 됐다.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 아닌가?

그럼에도 이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형통한 것이라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요셉의 총리 됨을 보고 이 정도의 축복이면 그런 부당한 자리라도 겪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요셉을 그런 부당함을 견딘 이후에 총리로 만드신 것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원함을 알게 하시는 단계의 한 부분이고, 그 단계의 마지막은 그조차도 없이 선을 행하다 악에 의해 부당함만을, 억울함만을 당하기만 하는 자리라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라면,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검증적 도전을 받는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기로 선택한다면 그 동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나의 높아짐이고, 나의 부함이고, 나의 형통함과, 나의 건강함이라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동기와 무엇이 다른가?


악의 동기는 분명하다. 즉시적인 유익함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빼앗은 것들은 즉시적인 유익을 준다.

힘없는 자를 억압해 착취하면 그 착취함의 크기만큼 유익이 된다.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고 불법과 편법으로 납세를 피하면 그만큼 내 금고는 풍성해질 것이다.

이렇듯 즉시적인 유익과 만족은 악을 행하는 커다랗고 분명한 동기가 된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함에도 유익이 주어지는 것을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선택일 뿐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는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동기와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유익을 쫓아 선택한 선은 언젠가 더 큰 유익을 주는 악으로 대체될 수 있음이다.


논리적 비약일까?


하지만 사탄은 실질적으로 이 지점을 공략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지 않는가?


불편하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그 뜻을 따라 사노라 했던 나의 내면의 동기가 발가벗겨져 드러난 것 같고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당하는 것 같다.


두렵다.

잘못된 동기에 구원함이 있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하나님이 만드시길 원하시는 나라는 무엇일까로 대체할 수 있다.

천지를 창조하시며 원하셨던 그 나라다.

그 나라를 만드시면서 사람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 그 이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길 바라셨다.

그리고 만드신 세상을 사람을 통해 다스리게 하심에 있어 하나님은 사람을 종이나 노예로 대하지 않으셨다.

직접 만드신 피조물이지만 동역자로 부르셨다. 뜻을 같이해 함께 일하는 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처럼 명령하심으로 만들지 않으셨고, 자신들의 형상을 따라 손수 빚으셨다. 직접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외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처럼 생각과 판단을 할 줄 알고 그 생각과 판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선택하는지 일 것이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야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선택함에 있어 그 동기는 무엇이어야 할까?


이 질문에 오늘 요셉의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의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인식했다면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과 같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그분의 뜻을 기준 삼기로 선택한 그 동기는 그분의 뜻 자체여야 한다.

그냥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기에 행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 자체가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뜻이 충만하게 실현되는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함이 없는 세상이다.

오히려 다른 생명을 살려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나보다 약한 자를 착취하는 세상에서는 나도 나보다 강한 자에게 착취될 뿐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고 착취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의 결과는 모두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공멸일 뿐이며 그런 세상은 분명 지옥이다.


하지만 나의 가진 것으로 나보다 남을 먼저 돌보고, 그렇게 나도 누군가에 의해 돌봄과 필요를 채운다면 그런 세상은 분명 모두가 살 수 있는 공생하는 곳이며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의 본질이며 그 선을 행해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에 다른 의도와 동기는 필요치 않다. 그분의 뜻이 실현되는 것 자체가 천국이고 만족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셉이 노예였음에도 형통했다 말할 수 있는 이유이고, 부당하게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뜻하신바 선함이 이루어지는 자체로 만족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미리 체험케 하는 예시적 상황이라 판단된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가 행한 일들 말이다.

7년간의 대 풍년을 요셉은 애굽으로 방탕하게 누리도록 하지 않고 절제하여 저축케 한다.

그렇게 아낀 것들은 이후 7년간의 기근동안 애굽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인근나라와 요셉의 형제들까지 구원한다.

내 것을 아껴 다른 이들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예시를 보여주심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상에 불과하다.

나의 한계적 식견이지만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이 이런 선함이 충만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 하나님의 나라는 노예 됨에도, 죄인 되어 옥에 갇힘에도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자체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 요셉도 자신이 꿈을 해석해 준 고관이 사면을 받아 다시 왕의 신하로 복직할 때 자신을 잊지 말아 주기를, 자신의 억울함을 기억해 자신도 감옥에서 나가게 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형통했다지만 감옥에 갇힌 상태는 요셉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예시라고 말할 수 있는 곡식을 아끼고 나눠 백성과 주변 나라를 살리는 일을 행함도 대가를 받고 판매를 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재물을 받고 팔았고, 다음엔 가축을, 그다음엔 땅을 받고 마지막엔 몸, 즉 소작농이나 노예를 삼는 대신 양식을 주어 연명케 했다.

그렇게 요셉은 애굽이 백성과 주변 나라들의 부와 땅을 흡수해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창세기 47장 19절 ~ 21절)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에는 악함과 공존하기에 발생되는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

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함이 이들과 대립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과 선을 행함이 늘 부당한 피해를 초래할 텐데, 더구나 그렇게 악과 공존함이 지속된다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질 수 없을 텐데, 요셉조차 피하고 싶어 했던 이런 상황을 감래 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 선함이 순전하게 실행되지 못하고 악한 방법과 결부되어 결과적으로 거대한 악이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실행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런 선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순간이 온다 해도 그전에 선을 행함으로 악에게 억울하고 부당하게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기만 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은 무엇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이 옳아 그것을 행함으로 만족했으니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다고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정리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함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악과 공존해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사는 공생이 아니라 악함이 살고 선함이 죽는 결과만을 초래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던 선함조차 공존하는 악의 영향을 받아 온전한 선이 될 수 없고 그 결과로 다른 악함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만이 실현되는 그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해야 하는가 말이다.


만약 언젠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 옳음을 깨닫고 온 세상에 그분의 뜻만 실현되어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진정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이런 날을 위해 부당함과 억울함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기만 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그것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바라심을 떠나 우리는 그런 삶을 어떻게 수긍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정리하고 몇 날을 생각해야 했다.

도저히 결론을 지을 수 없는 생각만 풀어놓은 것이 아닐까 후회도 했다.

그냥 부당함을 요셉이 총리가 되어 모두를 구원한 그 지점에서 그것을 소망하며 견디자고 글을 맺었어야 했나 싶었다.


그러다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공감하고 동의해 선을 행하고 그 결과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라면,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동의한 사람들만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이 생각 끝에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비유가 생각났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장 24절 ~ 30절)


누가 알곡이 되어 곳간으로 들어갈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공감하고 옳다 생각해 그 옳음이 동기가 되어 선을 행하는 자 들이다.

한 가지 무서운 것은 누가 가라지일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악을 행하는 자는 당연히 논외다. 분명하게 그 행실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그 뜻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동기가 선을 행함으로 유익함을 얻을 줄 기대하는 사람이 가라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라지를 뽑지 않음이 구분하기 어려움 때문이라 말하는 이유다.


아직까지도 과정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다스릴 진정한 동역자를 찾는 시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곡인가? 가라지인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다 증명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또 다른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으로 설명하신다.

가치를 입증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것 자체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억울함 부당함, 고난과 심지어 생명까지라도 버리면서 까지 선택할 수 있는지 증명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치입증의 실제를 요셉을 통해 목격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예수님을 통해 확인한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만큼은 피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한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는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함 뿐이었다. 그 선함이 악을 쫓는 자들에 의해 부정당해 부당하고 억울할 뿐 아니라 극심한 고통가운데 죽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장면 아닌가?

피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신다.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 직전 고백하신다. "다 이루었다."

그저 온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했고 오직 그것으로 인해서만 만족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다.

세상이 바보 같다 조롱하고, 부당함과 억울함을 당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옳음을 증명하셨다.

하지만 이런 결과에도 분명한 것은 요셉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함에 부당한 고난을 감수한 것과 요셉의 총리 됨과 예수님의 영광된 부활과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결과가 보장되지 않음에도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함이 옳기에 행하는 사람임을 검증하고 찾으신다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하게 파악해야 할 인과관계는 이런 사람들로만 모여야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요셉의 총리 됨과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한 것의 보상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 현재 하나님을 따르는 동기는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상황 속에서 각각의 동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단 하나. 창조 시에 인간을 만드신 바로 그 이유다.

하나님나라를 함께 다스릴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에 맞춰 찾아오시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그대로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하나님의 동기에 우리가 맞춰지도록 하신다. 그 과정이 요셉이고 마지막이 예수님이시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지나 예수가 돼라 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온전히 하나 된 하나님의 동역자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나는 어디쯤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좋았다. 이삭의 하나님도 좋았고 야곱의 하나님도 괜찮았다.

요셉의 하나님도 나중에 총리 같은 걸로 보상해 주신다면 괜찮은 것 같다.

그리고 예수는, … 그저 부족한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고 그것을 믿어 구원함을 받게 하는 존재로 좋았다.

그 예수를 믿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만나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 나의 정확한 바람이다.

그런데 예수가 돼라 하신다면…

감당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솔직히 감당하기 싫다.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생각과 글을 싸질러 놓아 버렸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이쯤에서 글을 마치려 한다.




PS

구조화되어 극복할 수 없는 악.

요셉을 죽이려 했던 형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글의 중간에 함께 다뤄보려 했으나 기회를 찾지 못해 이렇게 별첨해 생각을 정리합니다.

본문이 정리가 안되어 싸질러 놓고 뒤처리 안된 것 같은 찝찝함에 뭐라도 정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보상심리 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아버지가 보낸 동생 요셉을 발견한 형들은 요셉을 죽이자 공모합니다.

아마도 요셉을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겠죠.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분노가 가라앉은 것인지 죽이는 것은 아니다 싶었나 봅니다.

장자 르우벤이 죽일 것까지 없지 않냐며 그냥 구덩이에 던져 놓자 합니다.

성경은 르우벤이 나중에 꺼내어 살리려 했다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이 지나쳤다. 그냥 죽이지 말자 하면 될 일인데 그 말을 못 합니다.


유다도 생각이 같았던 것 같습니다.

르우벤이 구덩이에 던져 놓자 했지만 나중에 살리려 했다는 것은 모른 채 그저 우리 손에 피 안 묻히고 죽이려나보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두고 가면 어치피 굶어 죽던, 짐승에게 잡혀 먹히던지 할 테니까요.

그래서 마침 지나가던 상인에게 파는 것이 요셉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겠다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생명은 보존한 채 요셉을 먼 곳으로 보내버리면 눈엣가시 같은 요셉이 사라지는 것이니 죽이려던 이유는 충족케 되고 죽이자 공모했던 다른 형제들도 납득시킬만했을 테니까요.


요셉을 죽이려던 생각이 지나치다 생각한 형제들이 이 둘 뿐이었을까요?

르우벤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했고, 유다의 제안에도 이견 없이 동의했던 형제들입니다. 아마 나머지 형제들도 한순간 들었던 생각을 돌이켰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에 요셉을 파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왜 이들은 모두 생각을 완전하게 돌이키지 못했을까요?


이렇게 악으로 연대하고 그 악으로 관계를 구조화 한 이후에는 선한 생각이 들어도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생기더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돌이켜 지고 선한 생각이 들어도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못해 선을 행할 수 없어 그나마 차악을 선으로 생각하게 되어 선택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했던 일들을 곰곰 돌아보면 완전한 선일 까요? 아마도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을 뿐일 겁니다.


이와는 반대로 선함이 구조화된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하나님은 구조화된 선은 원하지 않으시겠다 싶습니다.

선함으로 관계된 구조속에서 자기 생각과는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선을 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재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내면의 원함이 아닌 주변사람들의 시선때문에 선한척 합니다. 법이 주는 불이익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과 법이 주는 불이익 마저도 더 큰 유익이 생긴다면 극복하고 악을 선택하더라는 것이죠.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검증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려 하시는구나 생각해 봅니다.

악과 선에 대해 분명한 스스로의 판단의 기준이 있어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것이 참 선이기 때문이겠죠.


악은 더 악해지기 위해 구조화하려는 속성을 지향합니다.

반면 선은 참선을 지향하기에 각자의 순전한 동기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선함은 개개인으로 파퍈화되어 거대하게 연합된 악과 싸워야 하기에 이겨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한 자체로 만족할 뿐입니다.

그저 언젠가 하나님이 값아 주시길 가슴치며 소원할 뿐입니다. 그저 이렇게 죽더라도 다시 살려 부르실 그 나라를 기대할 뿐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고백합니다.

그것을 소망함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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