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y Nov 02. 2024

창세기 에필로그

창세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나타난다는 것이 창세기가 말하려는 바라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성경 전체의 주제이지 싶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 세상을 다스리는 것.

맹목적이 아닌 이유와 의미를 생각하고 옳다 생각하고 옳은 것이기에 선택하고, 옳은 것이기에 기꺼이 감당하는 삶.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에 의해 온전히 실현 되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

그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포되어 나타났지만 온전히 실현되지 못함은 인간의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저면 필연이다. 모든 개념들은 상반된 것이 있어야 비로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있어 빛이 있고, 춥다는 상황이 존재해야 따듯함과 더움이라는 상황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하고 옳다고 파악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개념도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취사 선택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현재의 세상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필연적 이유일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의 욕망으로 기준삼길 원했고, 카인이 하나님이 옳다한 아벨을 죽여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옳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스스로의 욕망을 따라 상대를 죽여 내가 사는 삶을 살다 공멸한 것이 홍수와 방주 사건이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하심에도 스스로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히려 연합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 하나님에게 까지 맞서려 한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을 가르쳐 다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시려 한사람을 택하시고 긴밀하게 함께 하신다.

그의 자손들에게도 동일하게 함께 하시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알아가게 하신다.


이처럼 스스로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을 하나님의 옳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과정을 보게 된다.

더불어 각자의 욕망을 따라 살며 상대를 죽여 나도 죽는 공멸로 달려가는 존재들을 상대를 살려 나도 살게되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창조시 기대하셨던 그 나라를 소망하게 하신다.


나의 소망함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십년을 하나님을 믿어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삶이었는데도 그러하다.

하나님을 소망해 욕망을 채우려던 나를 보게 됐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마지막이 요셉이라니…


마치 아담과 하와로 시작해 요셉으로 끝나는 이 스토리가 아담과 같았던 나를 결국 요셉처럼 만드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적 선언 같다.


어찌 요셉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부당함에도 원망함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가능키나 한 것일까?

그렇게 스스로의 원함 없이 하나님의 원함만을 따라 사는 삶이 살아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원함은 알았지만 고민은 더 커지는 이 상황은 해결 될 수 있을까?

이전 19화 19. 죽은 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