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 까지 애굽에서 함께 거하게 한다.
이에 야곱은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으로 향한다.
그리고 야곱 일가족의 애굽행을 하나님도 허락하신다.
단, 반드시 야곱을 인도해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하시겠다 약속하신다.
아마도 야곱의 마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떠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던 것 같다.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협을 감수하면서 까지 돌아온 곳이다.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삶의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신했고 그만큼 그 약속은 소중했다.
더구나 자신은 생이 거의 다해가고 이제는 자신보다 더 중요한 아들들에게 이곳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이 이루어지길 기대했을 텐데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살아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을 저버리고 가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야곱은 희생제사를 드린다.
이런 야곱의 마음을 하나님도 아셨던 것일까?
가도 된다 하신다.
심지어 하나님도 함께 가시겠다 하신다.
그리고 반드시 야곱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하신다.
하지만 애굽에서 야곱으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도 하신다.
허락하신 땅,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에서 이루신다 하신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장 1절 ~ 4절)
그 약속을 믿어 야곱과 그의 자녀들의 일가족 70여 명이 애굽으로 이주했고 요셉이 마련한 고센땅에 정착해 살아간다.
그리고 애굽에서의 생활 17년, 야곱은 147세의 나이로 애굽에서 죽음을 맞는다.
죽기 전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어 장사된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할 것을 요청한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창세기 49장 19절 ~ 33절)
결국 야곱은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죽어서야 이루어진다.
죽은 이후 이루어지는 약속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야곱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에 살아 돌아갈 것은 생각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야곱을 지명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이 약속 역시도 그의 생전에 이루어질 약속은 아니었다.
그저 열두 명의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아들들에 그들의 아내까지 고작 100여 명이 있는 정도였다.
민족은 고사하고 한 부족을 이루었다 말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현재의 상황은 기근에 양식이 없어 애굽으로 굶주림을 피하고자 떠나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기 요원해 보인다.
다시 같은 질문을 만난다.
죽은 이후 이루어지는 약속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어떤 답이 있을까 고민하며 다음 내용을 살펴봤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두려워한다.
아버지가 살아있어 자신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제는 그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딱 자기들 수준의 생각과 그로 인한 걱정을 한다.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약속이라도 믿고 소망하는 야곱과 현실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 야곱의 아들들.
이 둘이 대비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비교되는 한 사람이 더 있다.
요셉이다.
그는 자신에게 저지른 과거의 죄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는 형들에게 그 악함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며 오히려 자신에게 행했던 그 악한 일로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형제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기르겠다 약속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장 20절 ~ 21절)
자신만을 바라보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았지만 자신과 현재를 극복하고 사후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야곱.
여전히 현재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는 요셉의 형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초월해 담담히 현실을 살아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는 요셉.
이 세 사람을 동시에 마주하며 묘한 감정이 인다.
답이 보이지만 그 답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현재의 문제와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그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지?
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라면 소망하며 감당할 수 있는지?
야곱의 형들처럼 여전히 현실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 나에게는 매우 버거운 삶의 태도와 지향점이 아닐 수 없다.
창세기는 이 세 부류의 사람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마무리된다.
아마도 이런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나,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싶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인가?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