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스토리는 선한 의도와 행동이 악한 의도와 행동과 만나 대립했을 때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표본적인 사례이다.
그 사례가 보여주는 바는 극심한 불이익이다. 이럴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선함은 손해, 피해만 초래하게 된다.
이런 결론이 성급하다 할 수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면서는 그래도 대부분 올바른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런 정의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법과 제도를 만들기 위해, 자금의 사회적 규범들을 만들고 합의를 이루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큰 싸움을 해 왔으며, 그 싸움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조금은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현재의 상황도 법과 제도,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은 이것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주는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켜지고 있을 뿐, 그 불이익보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진다면 법과 제도, 규범 등은 쉽게 무시되고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함을 우리는 또한 매일 목격하고 있다.
그래서 어찌하라는 것인가?
그 어찌함에 대해서 요셉의 스토리를 기획하고 써 내려가신 하나님께 물어보려 한다.
야곱의 아들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이 선택해 민족을 이룰 근간이 될만한 자들일까 싶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또 다른 부인인 빌하를 범한다. 빌하는 친모의 여동생, 즉 이모이자 다른 부인인 라헬의 몸종이었다.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하던 시기 자신의 몸종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나으라며 야곱의 침상으로 들여보내 결국 야곱의 또 다른 부인이 됐다. 르우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형제들을 낳은 아버지의 여자와 성관계를 한 것이다.
강간당한 동생의 복수라고는 하지만 형제들은 연합해 교묘한 계책으로 상대를 속여 한 부족의 남자를 몰살시키고, 여자와 재산을 노략한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탐욕과 폭력성이 기회를 만나 발현된 것일 테다.
이런 문제 많은 장성한 남자 형제들 사이에 아직은 어리고 여린 요셉이 있었다.
야곱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이다. 그만큼 이뻐했고 사랑했다.
이런 아버지의 유별난 애정도 다른 형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텐데 요셉은 여기에 더해 형들의 악행을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한다. 이런 동생 이뻐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동생이 꿈을 꾼다. 풀이한즉, 자기들이 동생 요셉에게 절을 하는, 섬기게 된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다른 꿈에서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요셉에게 절한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요셉이 아버지의 그 총애를 등에 업고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동생의 의도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일까?
결국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 모의했고, 우여곡절 끝에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벗긴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적셔 요셉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 같다 거짓으로 알린다.
아버지는 요셉의 죽음에 더할 수 없이 슬퍼하며 애통해한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 지어진다.
요셉의 형들은 보이는 것처럼 악했다.
그렇다면 요셉은 선했나?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요셉의 선함을 찾기는 어렵다.
아버지에게 형들의 잘못을 고하고, 아버지의 시키는바 형들을 잘 감시하는 정도로 그가 선했다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민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확실히 선했다. 보디발의 집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모습과 신임을 얻어 집안의 모든 것을 관리하게 된 것도 그렇고,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친 것도 그렇다. 감옥에 있을 때도 그는 간수장이 인정해 감옥 안의 제반 업무를 맡길 정도로 선했고 신뢰할만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가 더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의 선함의 동기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타고나길 선한 성품으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므로 선함이 나타나는 것인지 말이다.
요셉의 선함은 후자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행했다. 무엇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나? 그를 대한 자들이 하나같이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본다 고백하기 때문이다.
보디발의 고백이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 39장 3절)
옥에 갇혔을 때 간수장의 고백이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세기 39장 23절)
애굽의 왕 바로의 고백이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오 하고(창세기 41장 38절)
이렇듯 요셉을 대했던 모든 사람들은 요셉의 행동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요셉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행했지만 악한 의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부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죽이려 했다. 다행히 상인에게 파는 것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말이다.
팔려간 애굽에서 그의 선함은 더 크게 나타나지만 악한 유혹을 뿌리친 대가로 옥에 갇힌다.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성경에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지, 왜 하나님은 선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는 즉시적으로 개입하시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정과 실수들에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들을 직접 해결하시며 인도해 주신 것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데, 즉시적으로 개입하시고 잘못과 실수에도 관대하시며 너그럽게 용서하실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심지어 축복까지 해주시는 하나님인데, 요셉의 하나님은 심지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요셉에게 왜 이렇게 인색하실까? 왜 이런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역사하셔서 지키시지 않으시는 것일까? 당황스럽고 그 하나님의 의도가 많이 궁금해진다.
왜 하나님은 대응의 방법을 바꾸신 것일까?
아브라람을 처음 선택하실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란 생소한 신에 대한 존재감과 기대함이 중요했다. 관계 맺기의 1단계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렇기에 적극적인 개입과 문제해결, 축복으로 아브라함에게 다가가셨고 여호와라는 신에 대한 존재감과 기대감을 갖게 하셨다. 하지만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문제에서만큼은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함으로 얻을 수 있게 하시는 훈련도 하셨다.
아브라함을 대응했던 하나님의 방법은 이삭에게도 대부분 동일하게 유지된다. 야곱에게도 큰 틀에서는 유지되지만 야곱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망하고 그 소망하는 것들을 위해 감래하고 극복하도록 연단받는 자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요셉이다.
살펴보니 하나님의 대응 방법은 점차 그 강도와 난이도가 높아진다.
정확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본질을 점점 더 크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사는 삶에는 반드시 악의 세력과 부딪침이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한 손해, 피해, 고난, 어려움이 필연적이라 가르치신다.
그것을 경험케 하시고 겪어내도록 훈련하신다.
정리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는 돌봄과 축복을 맛보게 하셨지만 야곱을 통해서는 이를 위해서는 감래 할 것이 있음을, 요셉을 통해서는 그 감래함에는 악한 세력에 의한 고난과 어려움도 있다는 것을 단계적으로 체계적으로 알려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난을 겪음이 마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본질임을 알려주시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아브라함과 같은 삶도 있겠고, 이삭과 같은 삶도 있겠고, 야곱과 같은 삶도 있겠지만 실제적인 성도의 삶은 요셉의 삶과 같다는 것이다.
허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함에 있어 항상 악에 대한 도전과 위협을 받으며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을 수반한다는 것.
두려운가?
하지만 요셉의 삶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니 벌써 낙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다. 애굽을 7년간의 풍년동안 방탕하고 소모적으로만 두지 않고 절약하고 저축해 이후 7년의 흉년을 대비케 해 애굽을 구원한다. 더 나아가 인근 지역 굶주린 주민들의 살아갈 방법이 되었고 심지어 자신을 시기해 팔아버린 형제들까지 구원하게 된다.
야곱은 심각한 기근에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듣고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 곡식을 사 오라 시킨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요셉의 형들과 아버지 야곱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을 만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요셉 스토리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팔아버린 동생을 애굽의 총리로 만나게 된 요셉의 형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시기심에 동생을 죽일 생각까지 했던 너무나도 악한 그들이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던 그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요셉을 통해 구원함을 받게 되는 사건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하는 것이다.
부모와 더불어 형제들 모두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꿇어 절하며 생명을 의탁하는 상황에서 과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치부하고 시기하던 요셉의 그 꿈이 단지 요셉의 기고만장함이 아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현재가 된 미래에 대한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텐데 이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성경은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이 팔아버린 동생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두려움 이면엔 자신들의 악함의 결과와 요셉의 선함의 결과가 대비되어 후회함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이런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에 대해 다시 한번 크게 느끼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삶에는 악에 의한 어려움이 필연적임을 알려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해 그들로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었음을 알게 되는 부분이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축복은 자신들의 욕심을 쫓아 악을 행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그 뜻을 따라 사는 선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악함으로 대했던 형들에게 똑같은 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함으로 대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오히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임을 고백하는 요셉의 모습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모두 담고 있다.
이렇게 요셉의 스토리에는 하나님을 따라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의 본질이 생명까지 위협하는 어려움도 감래 해야 함을 알려주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택했지만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야곱의 아들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하나님의 고민이 녹아있다.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선을 행하며 사는 매일이 부침이고, 어려움이고 고난의 연속이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선함을 지켜나가야 하는가 말이다.
오늘 그 답을 요셉의 이야기에서 듣는다.
결국 요셉을 축복하시고 총리로 만드셨고 형제들까지 구원케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마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결국 하나님이 갚아 주시니 고난을 참고 부당함도 견디며 선을 행하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아쉽지만 그 정도의 의미로는 부족하다.
요셉의 스토리는 불이익과 부당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너머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음글에서 그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