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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Oct 05. 2024

16. 다말은 왜 시아버지 유다와 잤을까?

성경은 갑자기 야곱의 아들 중 유다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가족사를 조명한다.

갑자기 인것이 요셉이 팔려간 이후에 시작되고 유다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다음장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가 보더라도 이어지는 이야기 가운데 끼워 넣은 느낌이다.


그래서 더 집중해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다는 형제들을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냈다 한다. 그곳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동침해 아들 셋을 낳은 것과 첫째 아들 엘을 위해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들인 것, 하지만 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지만 악을 행해 하나님에 의해 죽었다 기록한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세기 38장 7절)


그들의 풍습에 의해 아들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아들의 가까운 친인척을 통해 후손을 보게 해 대를 잇도록 했다. 이것을 기업 무른다고 한다. 때문에 엘의 동생,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동침해 임신을 시켜야 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창세기 38장 8절)


그러나 둘째 아들 오난은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게 될 것을 알고 다말과 관계만 하고 체외 사정을 하게 된다.

형수가 자식이 없으면 아버지의 재산 중 자신의 분깃이 더 커질 수도 있어 그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악하게 본 하나님은 둘째 아들 오난의 생명도 거두신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창세기 38장 9절 ~ 10절)


아직 셋째 셀라는 어려 기업무를 때가 아니다. 해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기다리라 했다. 하지만 셀라가 장성한 후에도 유다는 셀라를 통해 첫째 아들의 기업무르기를 실행하지 않는다.

유다는 다말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들의 죽음의 원인이 며느리 다말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셋째 아들까지 다말과 관계해 죽게 될까 두려웠던 것.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창세기 38장 11절)


시아버지 유다에게 셋째 셀라를 통해 기업무를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 다말은 유다의 여행길에 창기로 분장하고 다가가 시아버지와 동침한다.

그리고 그 동침의 대가(화대)는 나중에 받기로 하고 대신 징표를 받는다.

나중에 유다가 대가를 치르려 창기를 찾지만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며느리 다말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고 그 소식을 들은 유다는 다말이 부정하다 판단해 죽이려 한다.

하지만 시아버지에게 징표를 내민 다말, 그날 창기인 줄 알고 동침했던 여인이 며느리 다말이라는 것을 알고 유다는 다말이 옳다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말은 출산하여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다.


여기까지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의 대강이다.


갑자기 끼어 넣은 것 답게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성관계, 그리고 출산.


이 행위의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왜 다말은 시대적 규범에 의해 비난과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그녀가 유다의 며느리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적통후계자 야곱의 가문에 대한 가치를 높게 여겼기 때문일까?

아쉽게도 그런 다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확인될 수 없는 태중의 싸움까지 언급하며 야곱과 에서의 다름을 암시했던 성경의 저자다.

만약 다말이 행위를 야곱의 가문에 들어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가문에 남기 위한 행동으로 말하고 싶었다면 분명 그런 암시를 남겼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과 연관 지어 짐작하고 억측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럼 무엇일까?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하면 야곱 같은 성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도 바라고 원하고 고민해 방법을 찾는 가운데 얻어 냈다.

다말의 행동도 같은 맥락이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기업무르는 것을 계대결혼이라고 한다.

이는 이스라엘만의 관습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이스라엘이 민족이나 국가로까지 발전하기 전이였다.

이런 관습은 그 당시 근동지방의 전반적인 것이었고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의 관습법으로 정착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관습에 대해 시대, 사회적으로 평가할 꺼리는 많겠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남편의 죽음 이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계대결혼까지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은 생을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


아마도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자신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알았던 것 같다.

자신 때문에 두 아들이 죽었고 마지막 아들 셀라까지 죽게 할 수 없어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을.

분명 성경은 죽은 두 아들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죽이셨다 말한다.

두 아들을 직접 겪은 다말은 그 두 아들의 죄악을 알았고 자신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그로 인한 부당한 대우로 남은 생을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것에 수긍할 수 없었던 것.


결혼하고 배우자가 살아있다면 그 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추구해야 할 당연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 배우자가 죽어 혼자됐다면 그 관계의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에도 이런 당연함이 완전히 당연하게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하물며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시대는 대략 기원전 1,900여 년 전,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년 전이다.

가족과 부족단위로 살아갔고 구성원의 수가 힘과 생산성을 나타내던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여성의 본분으로 자식을 낳아 가족과 부족의 번성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되던 시절이고 때문에 남편이 죽어도 가문에 종속시켜 다른 형제를 통해 자식을 낳게 했다.


다말은 시대적 관습을 뛰어넘어 남편의 죽음이후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 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에 대한 부당한 인식은 불식시키고 시대적 관습에 따라 자식을 낳고 가문의 구성원으로 정당하게 살아갈 권리는 찾아야 했다. 다말은 이를 위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자신을 옳음을 증명하고 권리를 찾아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이 이런 다말의 행동을 조명하고 그녀를 옳다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에 의해 성경이 쓰여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3,500년 전이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이 벌어진 시대는 4,000년 전이다.

그 오래전 한 여인이 시대적, 관습적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찾은 일들에 성경은 옳다 말하고, 중요하다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 한 사람의 삶이 타인 및 시대적 관습, 그 무엇에 의해서도 억압되고 종속됨이 옳지 않음과 그런 부당함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한 용기와 실행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폐륜 같은 다말의 사건을 살펴보고 묵상하면서 성경이 담고 있는 삶의 가치가 결국 이런 것이구나를 알게 되며 놀라웠고, 그 말씀의 가치가 내 삶에 맞닿아 있음에 감격했다.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유다의 남은 막내아들 셀라와 더불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번성한 유다지파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더불어 유다와 다말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는 다윗과 예수의 직계 조상이 된다.

그리고 그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악용하는 자들과 그들에 의해 부당하게 죄인취급받으며 억압과 착취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의 올바른 가치를 전하신다.


성경은 그렇게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는 공동체와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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