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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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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이 May 14. 2023

많은 숙제의 날들

글자를 매개로 하는 어떤 치유

내 동생에게


5월인데 딸기도 제철이라고 하고, 참외도 제철이라고 해. 아침과 저녁 기온은 10도~15도고, 낮에는 25도까지 올라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모로 혼란이 있는 시기야. 봄이 제법 지나 많은 것들이 성장하고, 에너지를 얻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시기라고도 해. 참 신기하지. 생명이 에너지를 얻어서 생명을 꺼트릴 수 있다는 게. 원래라면 나도 한창 충동이 심해야 할 시기인데, 약을 먹어서 자살충동과 우울을 우울하지 않음으로 고정시키고 있어.


너는 그걸 아니? 노지에서 재배하면, 딸기는 초여름에 수확하는 늦봄~초여름의 과일이고, 참외는 한여름에 제철을 맞는 과일이야. 그러니까 딸기는 지금 제철인 게 맞고, 참외는 곧 제철이 다가오는 과일이지. 하지만 비닐하우스와 스마트팜 재배로 딸기는 '겨울 제철 과일'이 되었고, 참외는 '늦봄 제철 과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딸기는 왜 두 계절이나 앞서 출하되어 겨울 제철 과일이 되었을까? 봄이 끝나갈 때쯤, 그러니까 딸기가 야생에서 제철인 시기에 딸기는 끝물이 되어버리는 게 참 이상해.


나는 여름까지 참외 먹는 걸 참아. 왠지 참외는 "이제 여름이다."라고 생각될 때, 여름의 시작에 맞춰 먹는 과일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 것 같아. 어차피 내가 먹는 참외는 대부분 노지재배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꼭 시기는 지켜서 먹은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니 굉장히 의미 있으면서, 굉장히 의미 없는 것 같아.

그랬는데, 배달앱을 슥슥 넘기면서 계속 노오란 참외가 보이니까 너무나 참외가 먹고 싶더라고. 그래서 향도 약하고, 맛이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주문했어. 또 안 먹으면 음식에 집착하기 시작할 것 같았거든.


집 앞으로 배달온 노오란 참외는 참 달았어. 참외 향이 엄청 많이 났어. 정말 푹 익었더라고. 마치 여름까지 기다린 참외의 맛이 나서 충격적일 정도였어. 물론 비닐하우스나 스마트팜 같은 곳에서 생산된 것이겠지만, 너무 여름의 맛이 나서 이상한 기분이었어.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인 것 같아.

기대하면 실망을 하고, 기대하지 않으면 의외의 수확을 얻어. 그래서 계속 모든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면 적어도 내가 상처받는 일들이 적어지니까.


작년 9월, 도무지 업무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되어서, 사무실에 내 상황을 통보했어. 내가 지금 많이 우울하고, 자살 충동까지 있다고. 그랬더니 사무실에서는 1달 휴직을 제안했어. 일단 쉬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쉴 땐 쉬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해주었어.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

휴직과 동시에 심리상담을 시작했어. 첫 상담에는 울었는데, 그 후로는 울지 않았어. 올해 봄 어느 날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서 처음으로 회의실을 빌려 상담하는 날, 너의 이야기가 나와서 울었어. 지금까지 상담을 8개월 넘게 하고 있는데 딱 두 번 운 것 같아.


숙제가 참 많았어. 정말 많은 숙제를 해야 하는 날들이었어. 상담하는 내내 나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질문, 매주 내가 수행해야 하는 숙제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숙제를 안 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나는 언젠가 죽을 거지만, 그래도 내가 힘들다고 하니 기꺼이 휴직을 제안하고, 상담을 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숙제할 수 밖에 없었어. 죽을 땐 죽더라도 숙제는 하고 죽어야하지 않을까, 나에게 주어진 일은 하고 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상담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에게 계속 질문들이 던져지는 것이었어.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아니 어찌 보면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걸까? 매번 그런 생각을 했어. 상담 초기에는 계속 되묻는 질문에 짜증이 조금 나기도 했어(물론 표현하진 못했지). "왜 그렇게 느꼈어?', "그러면 너의 기분/감정은 어떤데?",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등 이런 질문들이 1시간 동안 수십 번 이어졌고, 나는 생각하려고 노력하다가도 가끔 지칠 때는 "잘 모르겠어요.", "생각한 적 없어요"라고 말하곤 해. 왜냐면 아무리 질문에 대해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거든. 마치 딸기가 겨울 제철 과일이라고 해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던 것 같이 말이야.

* 참고로 나를 상담해 주는 선생님은 14년 전 첫 직장의 사수로, 지금은 심리상담과 코칭을 전공하여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분이야. 선생님께는 예전에도 2번 넘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어. 중증 우울증인 지금은 내가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연락하라고 했고, 내가 돈이 없어 상담을 더 못 받을 상황에서 흔쾌히 돈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 상담을 계속해 주고 있어. 그래서 그는 나에게 편하게 말하고, 나도 그에게 편하게 말해. 비록 존댓말이지만 서로의 대화 안에서의 깊이는 서로 같아.


작년의 숙제들이 올해 정신의학과에 갔을 때 똑같이 요구되었어. 의사는 숙제 검사를 하진 않았지만, 이번주는 이것을 해봐라, 저것을 해보라 시켰지.

첫 주에 내준 숙제는 잘했는데, 따로 숙제 검사를 하지 않아서 그 후로는 그다지 나에게 내주는 과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 상담 선생님과 다르게 의사는 척도 점수를 반대로 해서 나에게 숙제를 내줬을 뿐 내가 이미 다 해본 숙제들이었거든. 그리고 그다음 주에 그 숙제에 관해서 묻지도 않는데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숙제를 내줘도 귀담아듣지 않았지. 그나마 나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정도만 귀담아 듣고 나머지는 항상 '어서 나에게 약이나 처방하시지'라는 마음으로 의사를 바라봤어. 어차피 검사도 하지 않을 숙제, 그리고 이미 내가 작년에 한 숙제를 다시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나는 심리상담을 여전히 받고 있고, 의사에게 요구되는 건 약을 처방하는 것뿐이니까. 항상 정신의학과 의사와 만나는 시간이 곤욕스러워. 예전에 안 좋은 경험이 여전히 정신과 의사와의 라포르 형성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아.


지금 숙제는 기록해야 하는 것은 거의 없고, 내가 직접 실행해 보는 것들이 많아.

예전 숙제를 돌아보면 내가 언제 우울한지 시간별로 점수를 매겨보기도 하고 이것을 통해 내가 무슨 일/어떤 시간대에 우울해지는지 확인하는 일을 했어.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연습을 많이 했어. 감사 일기를 써보기도 하고,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찾아보기도 하고, 나를 돌보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도 하고, 나의 인생 음식을 찾아보기도 하는 등 정말 많은 숙제가 있었어. 숙제하면서 평소라면 별생각 없었던 일에 꽤 긍정적인 의미 부여도 할 수 있게 된 것 같긴 해. 이건 비단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일에 연관된 타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처음으로 상담을 외부 회의실에서 해서 울었던 그날. 너의 이야기가 나온 날. 숙제는 아니었지만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떠니?'라는 권유에 잠시 흠칫했어. 왜냐면 너는 글을 읽을 수도 없고, 내가 편지를 쓴다고 해서 어디로 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너에게 단 한 번도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

그렇게 또 몇 개월을 보낸 지금, 에너지가 조금 나에게 돌아왔을 때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벌써 네게 4통의 편지를 보냈어. 참 신기한 일이지. 나에게는 지금이 너를 생각하는 시기인가 봐.



2023년 5월 14일

누나가



추신: 요즘 어릴 때 사진을 정리하고 있어. 초등학교 때까지, 그러니까 가족이 분리되기 전까지의 사진이 가장 많더라. 내가 유치원이 들어갔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사진이 매우 많아.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가족끼리 여행 간 사진도 참 많아. 그런데 너의 사진은 한 장도 없어. 3살의 내가 이불에 덮인 갓난아이인 너를 보고 있는 사진과 그리고 엄마가 굳이 왜 가지고 있냐며 13살 때 너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뿐이야. 이 사진들이 빛이 바래 사라지면, 나는 점차 잊혀 가는 너의 얼굴을 어디에서 다시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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