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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줄향 Mar 05. 2024

5.너에게서 받은 것

엄마집사의 일기

순이가 사흘 내내 물만 할짝거릴 뿐 도무지 먹지를 않는다.

먹지를 않으니 당연히 응가도 안 하고 있다.

사흘 전에 닭가슴살을 삶아줬을 때, 밥그릇에 양쪽 앞발을 다 담그고 열심히 먹던 아이가 사료는 아무리 줘도 고개를 도리도리, 심지어는 도망까지 가는 거다.

배를 만져봐도 홀쪽한 게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었다’는 옛 말이 생각날 지경.

퇴근길에 브리더 아주머니와 상의했더니, 원래는 사료를 잘 먹던 애인데 아무래도 엄마한테 어리광을 심하게 부리는 것 같다고, 기다리면 먹긴 먹을 텐데, 그래도 지금 너무 힘이 없어서 처지면 안 되니까 닭가슴살에 사료를 섞어서 줘보라고 팁을 주셨다.



퇴근하자마자 앞치마를 두르고 편수 냄비에 닭가슴살을 넣고 푹푹 끓였다. 그러고는 사료를 가져와서 뜨거운 닭가슴살 국물에 담가놓고 퍼지기를 기다렸다. 10분 지난 다음에 만져봐도 불은 기색이 없고 손가락으로 비벼도 으깨지지도 않는다. 이미 지난번에 닭가슴살에 사료를 섞어 줬을 때, 순이가 사료는 요리조리 다 피해서 입도 안 대고 닭가슴살만 쏙 쏙 골라먹은 걸 본 지라,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쪼꼬미 확독을 꺼내서 베비캣 사료 스무 알을 넣고 곱게 갈았다. 푹 익힌 닭가슴살을 쪽쪽 찢고 거기에 곱게 간 사료를 넣어서 휘휘 저어서 골고루 퍼지게 만들었다.  



콩이랑 순이를 놓고 동시에 간식을 주면 콩이가 먼저 다 먹어버릴 것 같아서 콩이 눈치 못 채게 순이만 살며시 1층으로 안고 내려와서 닭가슴살 접시를 디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 달리 냄새를 제대로 맡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처박고는 몰입하여 오직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순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고, 순이의 어리광에 당했다 싶기도 하고, 이 시어머님을 앞으로 어떻게 모시나 싶기도 하고, 계속 닭가슴살만 먹으면 영양소가 결핍된다는데 어쩌나 걱정도 되고…… 젤 많이 생각나는 것은 둘째 아들 어렸을 때 기억이다.

큰 애와 달리 둘째는 유난히 편식이 심하고 입이 짧아서 내 속을 태웠었다. 우유도 조금 먹다 말고, 이유식을 줘도 혀끝으로 밀어내고 뱉어 버리니 아이가 뭐라도 몇 숟갈 입에 넣고 삼키기만 해도 세상을 얻은 듯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한순간, 그렇게 어렵사리 뭘 좀 먹여 놓으면 돌아서서 설사를 줄줄 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 내내 애를 먹었었는데......

잠깐 둘째 어린 시절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순이는 벌써 밥그릇을 깨끗하게 다 비웠다.   



닭가슴살과 사료 무침(?)을 그득하게 먹고 나더니 순이는 세수를 한다.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고양이 세수다. 자세히 보니 앞발로 수염 옆의 입가와 눈 주변까지  열심히 부빈 다음에 그 발을 혓바닥으로 꼼꼼히 핥는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데 앞발을 핥을 때는 발등을 넘어서 발톱 사이와 발톱 밑까지 깔끔하게 핥아서 마무리를 한다. 코로나 터지고 나서 화장실마다 손 깨끗이 닦는 법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는데 손가락 사이사이와 손톱밑을 꼭 닦으라고 당부를 하더니 순이의 세수야말로 그 안내문 그대로다. 앞으로는 얼렁뚱땅 세수하는 아이들 보고 고양이 세수라고 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참으로 디테일이 갖춰진 세수다  



그러고 나서 순이는 소파에 늘씬하게 누워서 잠을 청한다. 천연덕스럽고 만족스러운 그 모습이 너무 어여뻐서 살짝 안아봤다. 만족스럽게 밥을 먹어선 지 순이의 몸에서는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앞발을 내 팔 위에 턱 올려서 늘어뜨리고는 잠을 주무신다. 쌔액 쌔액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까 그렇게 홀쪽하던 배가 이제 조금은 차올라서 순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맞닿아 있는 내 배를 간지럽게 한다. 가만가만 자세히 느껴야 느껴지는 부드럽고 섬세한 움직임, 이 어리고 가녀린 존재가 나를 믿고 편안히 잠에 빠져드는 모습이 왠지 눈물겹다.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전 존재를 순순하게 나에게 내맡겨 올 때 건네져 오는 충만함, 책임감, 몽글몽글한 사랑의 느낌.  오래전, 생활의 방법이나 능력이 전무했던 아이가 내 품에 안겨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내맡기던 그때의 그 느낌.

그러니 어쩌면, 애들 크고 나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할 말이다. 나중에 성묘가 된 순이에게, 내가 너 닭가슴살 삶고 사료 갈아서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니…라고 말할 일이 아닌 것처럼.



어디 부모자식 관계뿐일까, 다른 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사람을 좋아해서 마음을 줄 때,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고파서 궁리에 궁리를 더하게 된다.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좋아하는 음악은, 영화는… 또 무슨 선물을 받으면 기뻐할지….

그러다가 그 사람 마음의 과녁을 적중시켰을 때, 좋아서 환히 웃는 그 모습을 볼 때, 내 가슴속에도 등불 하나가 환하게 켜지고 봄밤의 공기처럼 촉촉해지고  마시멜로처럼 말랑해지는 그 순간이 온다. 그것이 그때까지의 나의 애씀과 마음씀에 대한 축복이고 보답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말은 사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무의미한 단어들일뿐이다.



다시 순이를 내려다본다.

지금 이 순간 내 품에서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이 순순한 내맡김의 느낌만으로 나는 이미 소중한 것을 받았다. 파르르 떨리는 이 심장의 파동 하나만으로도 나는 순이로부터 생명이 가진 본래의 기쁨과 에너지를 넘치게 건네받은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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