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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Feb 26. 2024

둘이기에 하나가 되고 싶고, 하나가 됐기에 헤어지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백수린 옮김), 『여름비』, 미디어창비, 2020

『여름비』에는 일곱 남매와 부모가 등장한다. 그러나 에르네스토와 잔, 두 아이 외 다른 다섯 남매는 한 덩어리인 양 집단명사로 서술된다. 이들은 에르네스토와 잔의 과거이고, 에르네스토와 잔은 이들의 미래이다. 찬란하던 유년 시절, 형제자매가 그저 하나의 우리였을 적. 우리가 우리일 때 세계는 그저 하나였기에 안전하고 온전했다. 그것이 너와 나로 분리되자 불안정해지듯이 주체의 나뉨은 근본적으로 슬픈 일이다. 어느 세계에 우리로 엮은 우리밖에 없었다가 갑자기 너와 내가 되며 유년은 끝난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는 운다. 분리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

에르네스토와 잔은 서로에게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물론 이 욕망은 섹슈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말 그대로 ‘한 몸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에 가깝다. 동생들이 그러하듯이 에르네스토와 잔에게도 둘이 하나였기에 더 온전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기에. 아직 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것을 애타게 바랄 때 유년은 연장된다. 유년이 끝나는 순간은 결국 너와 내가 하나가 아니고, 너와 나는 따로 각자 너와 나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때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함께 살 수도, 함께 죽지조차 않을 것임을 알았을 때.1) 그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작스레 몰아닥친 여름비처럼 갑작스럽고 돌이킬 수 없다.2) 그 애절한 정서가 우리에게 평생 유년을 그리도록 하기도 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말한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단 말이야.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3)

캐서린은 린튼을 향한 사랑과 히스클리프를 향한 사랑이 다른 것이라고 나눠놓는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일은 자신 영혼의 일부를 사랑하는 일과도 같다고. 그렇지만 자기 영혼의 일부를 가진 이와의 합치는 가능해도 사랑의 완결이 영혼의 합치가 될 때 사랑이라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 있다. 어느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그 존재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하지만 그 역시 따로 둘일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성취되지 못한다. 에르네스토와 잔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욕망이 실패된 삶은 온전한 활력일 수가 없고 후반부에 와서 (어쩌면 그 불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는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에르네스토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희망은 없”다고 단언하며 미래는 “그저 내일”에 불과할 뿐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4)이다.

다만, 그 뒤로도 삶이 이어진다. 유년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여기다. 에르네스토와 잔의 어머니가 갖고 있는 핵심 감정은 “죽고 싶어 하는, 버리고 싶어 하는” 욕망임에도 강렬한 사랑의 기억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어머니를 사랑한 나머지 자식들은 같은 강도로 사랑할 수는 없었던(그렇기에 늘 애써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에게 사랑은 절망임에도 무기력하게 삶을 이어간다는 것. 『폭풍의 언덕』 속 캐서린이 말하듯 그가 없어진다고 해서 삶을 버리지는 않겠지만 다만 온 우주가 서먹해져버리고 내가 그 일부로도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 다시는 이전과 같이 찬란하지는 않겠지만 마냥 애석하지만도 않게 되는 것.5) 그것이 삶이 이어진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1)마르그리트 뒤라스(백수린 옮김), 『여름비』, 미디어창비, 2020

“어머니 그 아이와 함께, 너는 모든 걸 원하지 / 에르네스토는 대답하지 않는다. / 어머니 그 아이와 함께 너는 죽기를 원하고. (...) 에르네스토 어느 날인가, 그래요, 어느 날인가 우리는 정말 그러길 원했어요. / 침묵. 느림. / 에르네스토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고요.”

2)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책

“여름은 단숨에, 난폭하게 들이닥쳤다.”

3)에밀리 브론테(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4)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책

“어느 날, 에르네스토는 말한다, 왕에게는 돌멩이의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찾아왔노라. 죽음과 같은, 돌과 같은 삶. 침묵.”

5)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책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토는 마침내 말한다, 그는 애석하지 않았노라. 더 이상 그는 아무것도 애석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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