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문학동네, 2014
무언가를 독해하는 데는 아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내가 자주 택하는 방법은 연상되는 서브텍스트와 연결해 읽는 것이다. 그런 접근에서 『빌러비드』를 읽으면서는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가 떠올랐다. 하지만 『빌러비드』에서 다루고 있는 인종의 문제를, 그 뒤에 남겨진 집단적 트라우마의 문제를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과 연결해 읽어도 괜찮을지 확신이 안 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그 인종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텍스트를 그저 독해하고 마는 것과 윤리적으로 읽는 것은 다른 차원에 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이 소설은 내게 기억과 재기억, 그리고 애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다. 세서가 겪었던 일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억을 잊는다고 해도 그 과거 자체는 영원토록 그저 일어난 일일 뿐이라는 걸 안다. 그런 기억이나 과거는 종종, 꽤 자주 갑작스레 올라와 발목을 잡는다. 어쩌면, 그건 어느 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발목은 언제나 잡혀 있었고 잡힌 대로 멍이 들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빌러비드』의 시작부에 세서가 귀신이 들린 집에서 그저 귀신과 (자신이 죽인 딸의 망령과) 동거하기를 택한 것처럼 말이다. 그 과거는, 망령은 어느 날 갑자기 빌러비드라는 실체화된 존재가 되어 세서에게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왜 자신을 죽였느냐고, 왜 내가 받아 마땅했던 애정을 주지 않았느냐고, 엄마는 내 것이라고 들어와 주장한다.
자식을 죽인 부모는 (그것이 자식을 위함이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명백히 자신이 아이에게 잘못했음을 안다. 아이의 생을 부모의 의지로 끊은 것은 속죄할 수 없는 죄였다. 그렇기에 기꺼이 죽었던 자식이 요구하는 것을 돌려주려고 하고 오히려 그 이상을 내어준다. 미치면서까지. 자신의 어머니가 미쳐가는 걸 본, 마지막으로 곁에 남은 유일한 딸 덴버는 그때 성장한다. 어머니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나누고 누군가는 구원되어야 한다고, 자신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어머니를 구원하고자 한다. 애도의 시작이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지만 떠나보낼 수는 있다. 다만 잘 떠나보내야 한다. 트라우마적 경험을 한 사람들은 보통 '잘' 애도하는 데 실패한다. 과거는 지울 수 없는 사건이기에 떠나보내기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세서가 마지막에 얼음송곳을 백인을 향해 든 순간에, 과거의 세서는 '이제 기니?(빌러비드)'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히려 자녀의 목에 톱질을 했지만, 현재의 세서는 그 송곳을(과거의 톱을) 백인을 향해 든다. 과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세서는 영원토록 그저 세서일 테지만 오늘의 세서는 다르다. 어떤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것, 애도한다는 것.
애도는 슬퍼한다는 애와 두려워한다는 도가 만난 단어이다. 그러나 그 슬프고 두려움을 밟아내고 난 뒤에는 바로 오늘이 온다. 세서를 떠났다가 돌아온 폴 디는 세서에게, "너와 나, 우리에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지만 "이제 무엇이 됐든 오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서는 이제야 오늘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 덴버는 세서만을 닮은 딸이 아닌, 아버지를 닮은 딸이기도 하다. 돌아오리라, 돌아오는 중이라 믿었던 아버지는 어쩌면 덴버를 통해 이미 귀환해 있다. 빌러비드의 망령은 세서를 떠나갔지만 세서의 곁에는 폴 디가, 남편과 자신을 쏙 빼닮은 덴버가 남아 있다.
이렇게 독해하면 『빌러비드』는 분명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토니 모리슨만이 할 수만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그 점이 『빌러비드』가 압도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편으로 확장해 읽으면서 자꾸 그 점이 걸렸다. 그렇지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점의 이야기를 미래의 사람인 작가가 썼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그 보편성으로의 확장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빌러비드』는 결국에는 집단적인 트라우마와 연결되는 이야기이므로, 5.18에 대한 이야기나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 성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도 생각이 닿는다. 끔찍한 일들이 늘 당연하게 일어나고 그걸 보고 있으면 사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이 다 소꿉장난처럼 느껴지면서 삶의 감각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느끼는 큰 무력감 같은 것. 물론 그거 말고도 어릴 적부터 삶의 순간순간이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 무언가를 거래한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 다 실체가 없어서 그 실체를 대체하는 화폐와 같은 사물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해서 그저 다 장난 같을 때가.
적어도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소설이 할 수 있는 바는 있을 것이다.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우스갯소리 같은 말이지만) 소설은 혁명조차 되지 못한다. 심지어 삶을 바꾸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분명 소설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이런 순간에 나는 그런 희망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