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생각보다 더 힘들었던 코골이 소음
대학 시절, 매일의 지하철은 나에게 작은 전쟁이었다.
사람들의 대화, 공공장소에서의 음식물 섭취 냄새와 각종 소음들...
불특정 다수가 세상이 쏟아내는 감각의 자극이 버거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섬세한 사람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HSP성향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내 안의 소음을 다루는 법을 오랫동안 찾아왔으니까.
HSP
고도 민감성 개인(Highly Sensitive Person)
매우 민감한 사람, 과민한 사람을 말한다.
심리성격학에서 쓰이는 특정한 기질 타입을 의미하며, HSP는 선천적으로 감각이 매우 민감하고, 감정 몰입 정도가 높으며, 심미안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서 15~20%가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일반인 평균보다 수신하는 감각에 예민하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자동적으로 전이받기도 한다. 미적인 감각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느낄 수 있어 예술가인 경우도 많다.
외출할 때 신분증은 두고 나와도, 이어폰만큼은 꼭 챙긴다.
고도 민감성 개인에게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은 그야말로 시대가 안겨준 발명품. 언제든 듣고 싶지 않은 타인의 통화 소음, 그들만의 대화 소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다.
여럿이 잘 지내려면 무던해야 하고, 과한 오지랖도 정으로 포장되는 한국 사회에서 살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한 달 넘게 생활하며, 자유를 느꼈다. '예민하다'보다 '민감하다'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도 섬세한 오감을 지닌 건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민감한 성향 덕분에 그에 맞는 제품을 고를 때도 심미적으로 아름답고, 철학이 명확한 브랜드를 조사하는 데 능통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앞두고서는 아예 'HSP 키트'를 따로 준비했다.
34일의 순례길, 바로 이어진 바르셀로나 여행까지 총 40일을 낯선 나라의 숙소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야 하는 환경. '콰이어트'라는 모델명의 이어 플러그는 여권과 지갑만큼이나 내 몸에 꼭 붙어있었다.
다이소에서 1천 원이면 구할 수 있는 폼 타입 스틱 형태가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소 저가 제품에 열광하는 걸 보고, 이 브런치 시리즈를 준비한 것도 있다.)
말랑한 실리콘 재질로 질 높은 수면, 더 깊은 몰입 및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브랜드 제품. 30배는 하는 가격(그래봤자 3만 원대) 임에도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굉장한 평온함을 얻었다.
한 공간에 놓인 수십 개의 2층 침대
살면서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경험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정도가 마지막.
혼자 산 지 10년은 훌쩍 지나 자의적으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자는 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레네 산맥을 넘어 거의 필수적으로 머물러야 했던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에서의 하룻밤은 악몽 그 자체였다.
이때부터 발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2층 침대에 배정됐는데 옆쪽 2층의 한국인 중년 남성의 코골이 소음은 진동까지 동반하여 엄청났다. 주변을 힘들게 하고 본인만 잘 자는 그 아저씨가 얄미울 지경.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코골이 소음이라 가져온 이어 플러그로도 차단이 안 됐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 막아도 이어지니 미칠 노릇. 물론 나도 피곤할 날은 코를 골 수 있고 모두가 피곤한 순례길에서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코골이 소음을 나무랄 수는 없다. 순례길 동안 엄청난 기세로 코를 골던 사람들은 중년의 남녀가 많았다. 후에 알베르게에서 4번 정도 마주친 대만인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같은 방 배정될까 조마조마..
타인에게 피해를 준 사람보다, 오히려 피해를 받아 힘든 사람을 예민하게 몰고 가는 한국 정서상 '그렇게 예민하면 개인실 예약하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본인의 코골이 소음이 심한 걸 안다면, 이들이 개인실을 선택하는 배려가 더 필요하다. 극장에서 일행과 시끄럽게 떠들고, 아작아작 팝콘을 씹어 먹는 사람들이 피해를 주는 것처럼.한 달 넘게 매일 다른 마을을 이동하면 이미 숙박비가 상당한 지출. 알베르게 및 호스텔은 어쩔 수 없는 선택. 론 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는 규모가 상당하다 보니 옆 침대의 코골이 소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음 날이면, 또 6~7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밤새 저 듣기 싫은 코골이 소음에 시달리느니,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새벽 2시.
나는 2층 침대에서 내려와 내 백팩과 짐을 챙겨 서둘러 그 공간을 벗어났다.
순례길에서 수면안대는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밤 9시에서 10시 사이면 자연스럽게 불이 꺼지고, 모두가 잠드는 분위기.
그보다 일찍 눕거나, 다른 사람의 조명이 피로하게 느껴질 때 안대를 착용하면 세상이 한 톤 낮아진다. 작은 천 조각 하나로 시야가 닫히는 대신, 마음은 오히려 넓어진다. ‘Privacy Please’라는 자수가 새겨진 그 안대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순례 후반부에 분실했다. (도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귀와 눈을 편안하게 하는 데 필요한 무게는 고작 20g이었다.
내향형이자 HSP 성향인 나도 산티아고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다스리는 태도 덕분이었으리라.
* 2025년 9월 5일부터 10월 9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하고 왔습니다.
유튜브 채널 통해서도 에세이 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