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산티아고 : 선별의 안목
몸도 마음도 무게가 늘어나는 나이.
인간관계도 물건도, 이제는 한 번쯤 리셋이 필요하다.
오래 붙들고 있던 것들이 정말 내게 필요했는지, 아니면 습관처럼 매달려 있던 건지 묻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게 그 무대다.
무게를 줄일수록, 남은 것들의 가치는 더 선명해질 테니까.
[ 비우고 산티아고 : 선별의 안목 ]
일상 속 깊숙이 자리 잡은 무선 가전기기들.
우리는 이 편리함을 너무 쉽게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직 멀쩡히 작동하는데도 최신 모델의 유혹 앞에 흔들린다. 그러나 이 편리함은 결국 배터리에 기대어 있다.
계절 몇 번만 지나도 배터리는 처음 같지 않고, 기기는 금세 골동품처럼 취급된다. ‘최신’에서 밀려난 준최신이 되는 순간, 방치되고 버려지며 결국 그 속의 배터리는 수백 년이 흘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지날 때마다, 매일같이 ‘썩지 않는 쓰레기’를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에 갑갑해진다.
내 집이, 내 공간이 깨끗해 진언정 지구 어딘가에는 천문학적인 쓰레기가 쌓이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가능한 한 배터리가 필요 없는 아날로그 제품을 선택해 온 지도 벌써 3년이 넘는다.
'0점 조정'이라는 사소한 수고는 필요하다.
아주 미세한 1g 단위는 불확실한 아날로그 저울.
하지만, 눈금 사이에 바늘이 기우는 미묘한 위치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무게를 가늠하는 감각은 더 예민해진다.
내 삶 역시 그렇게 최신 기준의 0점 조정이 필요했다.
29세에 패션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셀프 브랜딩으로, 30대를 온전히 채워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20대에 건강과 시간을 맞바꿔 얻은 실력, 30대에 수많은 인간 군상 속에서 얻은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값지게 존중받아야 할 40대라는 시기.
그러나 정작 그 모든 것이 성장 단계의 체계 없는 조직 안에서 헐값으로 소모된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퇴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연이었다.
20대는 무엇이든 채우고 시도하며 이별도 처음 겪는 시기. 그러나 40대는 다르다.
이제는 내가 가져본 것들의 가치를 가늠하고, 필요 없는 것들을 단호히 비워야 한다. 명품백, SNS에 올린 인간관계 자랑 사진, 짙은 색조 화장, 과음과 과식—이런 것들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빛을 잃는다.
20대의 나는 덩치만 한 백팩을 메고 떠나는 배낭여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첫 해외여행의 순간도 포기할 뻔했을 정도로 여행보다 멋진 브랜드 쇼룸에서 쌓는 커리어가 훨씬 재밌었다.
40대 들어 알게 된 순례길 역시 자아 성찰이라는 거창한 고난의 길로만 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커뮤니티에 가입하며 서서히 스며들듯 경험들을 바라봤고 급기야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백팩을 주문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33일 동안 800km를 걷는 여정.
그리고 이제 출국을 앞두고 있다.
낯설던 알베르게, 프랑스길, 생장 같은 단어들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사이, 가장 신중하게 고른 준비물은 백팩과 신발이었다. 매일 20~30km를 걸어 도착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다시 길을 이어가야 한다. 사실상 33일 내내 몸의 연장처럼 함께할 백팩이니 가볍고 단단해야 했다.
백팩은 체중의 10% 이하로만 채우라는 규칙이 있다.
경량 침낭 하나가 600g, 여름 내내 들고 다니던 날진 텀블러도 130g.
자잘한 10g대의 소지품들이 모이면 어느새 1kg이 되고, 최종 목표 무게에 근접한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입력하고 ‘청문회’를 연다. 정말 필요한가? 자주 쓰일까? 다재다능하게 활용할 수 있는가?
마치 만나면 즐겁지만 돌아오는 길이 찝찝한 인간관계를 손 보듯, 물건 하나하나도 다시 보고 또다시 생각한다. 당당히 그 가치를 분명히 하는 물건은 드디어 어여쁜 백팩 안에서 한 자리를 꿰찬다.
다이소에서 싸게 득템 했다고 자랑하는 일회용품은 결국 환경에 가장 비싼 쓰레기가 된다.
순례길 커뮤니티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
대수롭지 않게 싸게 사고 남의 나라까지 들고 와서, 결국 수요 없는 기부로 포장하며 쓰레기를 떠넘기는 것.
조금 비싸더라도 신중히 고른 오리지널 브랜드 제품은 5년,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든든하다.
결국 0점 저울 위에서 가치의 무게를 당당히 버틸 수 있는 제품만이 내 일상에 남는다.
내게 퇴사는,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고 다시 정확한 기준점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순례길 준비 또한 0g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