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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민, 현실의 벽

현실의 벽과 타협

by 피터팬


가장 먼저 벽에 부딪힌 곳, 그곳은 바로 가족이었다.


나는 부산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대학과 직장까지 줄곧 부산 1시간 이내의 거리에서만 살아왔다.

태어나 마흔이 되도록, 부산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내게 부산은 말 그대로 둥지였다.


제주 이민을 꿈꾸며,

더 늦기 전에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가장 먼저 털어놓은 대상은 가족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NO. NO. NO.”


차라리 혼자였다면 이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았을까.

과거 일까지 들추며,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 다루듯 걱정이 쏟아졌다.

부모뿐 아니라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불확실한 미래, 낮은 수입, 낯선 환경에 대한 걱정.

“지금 나이에 뭘 하겠냐”, “안정된 직장이 최고다.”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가족이라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힘들어도 내가 힘든 것이고, 실패해도 내가 겪는 일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무시당하는 건

정말 가슴 아팠다.

마흔 평생, 가족이 이렇게 큰 벽처럼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결심을 굳힌 뒤 처음 설득한 사람은 아내였다.

겉으론 긍정적으로 보였지만,

곧 현실의 무게에 망설였다.

모든 걸 내려놓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로

나만 믿고 떠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사랑한다고, 함께 가면 된다고 말해도

현실 앞에서 사랑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다.

안정된 수입이 없는 한, 낭만은 잠시고

현실은 거칠었다.


내가 제주에서 꿈꾸는 삶을 말하면

아내는 마치 먼 나라 이야기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말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수도 있고

현실은 언제나 계획을 비웃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 오래 사는 것도 아닌데,

인생에서 한 번쯤은 모험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다면 평생 후회는 없을 것 같아.”


아내는 결국 동의해주었다.

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내가 후회 없이 살 수 있다면 응원해주겠다고 했다.


현실과 타협해 택한 방법은

‘직장’과 ‘한 달 살기’였다.

일단 한 달만 살아보자고 하니

가족들도 마지못해 수긍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금방 포기하고 돌아올 줄 알았다고 했다.


제주도의 임금은 수도권에 비하면

아르바이트 수준이었다.

내가 받던 월급의 절반도 안 됐다.

그 돈으로 제주에서 집세, 생활비, 교통비를 감당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행히 퇴직금과 약간의 여윳돈이 있어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상황.

직장을 먼저 구하고, 원룸을 계약한 뒤

무작정, 야반도주하듯 아내와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

가장 먼저 느낀 건 ‘공기’였다.

맑고 상쾌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던 순간,

절로 숨이 트였다.


직장은 생각보다 빨리 구해졌다.

처음부터 ‘차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이 따라붙었다.

일하는 방식은 육지와 다를 게 없었고

다만, 월급만 조금 낮을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 다시 원룸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일상의 반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주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지...?’


센치한 어느 날, 퇴근길에 아내가 회사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오빠, 바다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10분을 달려 도착한 애월 한담공원.
노을이 번지는 바다를 본 순간,
마음속에 뭉쳐 있던 감정들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회사 밖으로만 나와도

이렇게 좋은 곳이 많은데,

나는 또 예전처럼 일에 파묻혀

딴 곳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싸온 도시락을

바닷바람과 노을 아래에서 함께 먹었다.

잠시였지만 내게 다가온 ‘여유’는

참 고마운 순간이었다.


이래서, 여길 꿈꿨던 거구나.

잠깐이라도 숨 쉴 수 있는 삶.

그 한 조각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 몰랐다.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용기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게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사는 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느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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