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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의 첫 시작

낭만보다 먼저 온 현실

by 피터팬


“바다를 보기도 전에 부동산부터 돌았다.

그렇게, 내 두 번째 인생은 작고 작은 원룸에서 시작됐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처음 한 일은,
바다를 보러 간 것도, 맛집을 찾아간 것도 아니었다.
현실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단단하게 찾아왔다.
바로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바닷가 앞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사는 삶.
누구나 제주를 떠올리면 그릴 수 있는 그림.
나도 그런 꿈을 품고 이곳에 내려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여름의 무더운 더위. 그리고 성수기.
정말... 하... 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제주 중심지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단기 임대는 모두 숙소로 나가 있었다.
어디 하나 빈방 구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


낯선 골목을 돌아 부동산 문을 밀었다.


“저기... 집 좀 알아보러 왔는데요.”
“여기 앉으세요. 어떤 집을 찾으세요?”
“원룸 나온 거 있을까요?”
“지금은 원룸이 다 나가서…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한 번 찾아봐 주세요.”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고,

머릿속은 텅 비어갔다.
그 짧은 대화에서조차
나는 '외지인'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하루에 네다섯 군데씩 부동산을 돌았다.
어디든 매물은 없고, 고개만 절레절레.
한두 군데에서 “요즘 성수기라서요” 하는 말도
이젠 들을 때마다 마음이 허해졌다.


처음엔 차가워 보이던 중개사들도
며칠 계속 얼굴을 보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집은 좀 별로죠?”, “이 동네도 많이 알아보셨구나.”
낯선 제주에서 그렇게 조금씩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도 생겨갔다.


그러기를 다섯째 날.
포기할까, 다시 올라갈까 고민하던 그날.
가장 처음 갔던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위치도 좋고, 출퇴근 거리도 괜찮은 원룸.
가격은 조금 높았지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살이의 첫 페이지는
화려한 바닷가 뷰도, 그림 같은 돌담집도 아닌
작고 작은 원룸 하나에서 조용히 열렸다.


해는 잘 들지 않았고,
창밖은 앞 건물로 가려져 있었지만
마트는 가깝고, 회사는 걸어서 30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어쩌면
무엇을 가지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감수할 수 있느냐에서 시작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작고 작은 원룸 하나가
제주 입도의 첫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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