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홀로서기
파도 소리보다 먼저 들린 건
이력서 출력 소리였다.
제주는 나를 시험했고,
나는 그 시험을 홀로 견디며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제주에 정착하려면, 직장이 필요했다.
무작정 내려올 순 없었다.
부산에서 입사 원서를 넣고, 7일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비행기를 탔다.
내 인생에서 처음, 면접 때문에 비행기를 탄 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에 도착했지만,
그날따라 제주는 낯설었다.
늘 좋아하던 풍경인데,
그 순간엔 낯선 공기와 말 없는 거리들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을 불러왔다.
그런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면접장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지원한 곳은 인터넷 신문사였다.
내가 예전에 받던 월급의 절반도 안 되는 조건.
하지만, 그 조건조차 감지덕지였다.
제주에선 어디서 무엇을 했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전 경력, 경험, 연봉 같은 건
섬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면접에서 가장 먼저 들은 질문은 이거였다.
“기존에 받던 월급보다 적은데 괜찮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지원했습니다.
글을 쓴 지 오래돼서, 잘 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한 번이라도 써본 사람은 금방 감 돌아와요.
한 달은 배우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하세요. 하하.”
제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왜 제주에 오고 싶었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면접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며칠 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출근 첫날, 대표가 내게 준 직책은 차장이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요? 차장...?”
제주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저 조용히,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어깨가 주어졌다.
예전의 스펙은 지금 내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차장’이라는 직책은
묵직한 기대이자, 보이지 않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그날, 내 책상엔
‘제주어 사전’과 관련 책들이 쌓여 있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읽어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제주어는 나에게 외계어에 가까웠다.
2년 가까이 일을 쉬었었다.
오랫동안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고 나니
예전의 리듬은 사라졌고,
손에 익었던 일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신입이라면 실수해도 욕먹고 배우면 되겠지만,
차장이라는 이름표가 붙는 순간
모르는 걸 묻는 것조차 주저하게 된다.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땐 잡지사 기자였고,
그 후엔 기업 홍보 일을 10년 넘게 했다.
글쓰기는 내 일상이었지만,
지금 다시 잡은 키보드는
15년 전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었다.
제주에 꿈을 안고 왔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조용히
내 두 번째 인생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