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선 30분도 먼거리
원래는 30분 정도면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다.
차 타고 한 번에 쭉 갈 수 있는 거리라면, 어디든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다고 여겼다.
실제로 다른 지역에 살 땐 그렇게 다녔다.
친구 만나러 40분, 마트 가려면 30분, 병원도 1시간 정도 거리면 별다른 고민 없이 움직였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으니까, 그냥 시간 맞춰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는 다르다.
똑같은 30분 거리인데,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진다.
단순히 거리나 시간보다도 ‘이동’ 자체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는 차로 40분 정도.
길도 잘 뚫려 있고 신호도 많지 않아서 막히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거리조차 선뜻 움직이기 어렵다.
뭔가 각오가 필요하다.
살기 시작한 초반에는 하루에 제주시와 서귀포를 몇 번씩 오가기도 했다.
드라이브 삼아 해안도로도 돌고, 맛집도 찾아다녔다.
그땐 제주 전체가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멈칫하게 된다.
‘오늘은 서귀포까지 가야 하나…’
‘갔다가 돌아오면 몇 시지…?’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
실제로 주변 지인들 말을 들어보면,
제주시 사람은 서귀포 잘 안 가고,
서귀포 사람은 제주시 잘 안 간다.
생활 반경이 딱 나뉘어 있는 느낌이다.
한번은 누군가 이런 말을 해줬다.
“옛날 제주 사람은 동쪽이나 서쪽에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관덕정도 안 넘어갔다더라.”
관덕정은 제주시 구도심 중심에 있는 오래된 정자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조금 과장된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말이 실감난다.
실제로 어떤 분의 어머니는 일흔이 넘도록
관덕정 너머로 가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한 번은 예전에 함께 일하던 차장님이 제주로 여행을 오셨다.
나는 제주시 연동에 살았고, 그분 숙소는 서귀포였다.
평소 같으면 ‘좀 멀지만 가야지’ 싶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움직이기 망설여졌다.
그래도 꼭 뵙고 싶은 분이라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했더니,
오히려 그분이 “가까운데 내가 갈게” 하셔서.
결국 제주시에서 만났고,
헤어질 때 그분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도 보니까 가까워 보여서 그냥 왔는데, 생각보다 머네.”
처음 제주에 오면 ‘생각보다 가깝다’는 말이 잘 나온다.
그런데 조금만 살아보면 ‘생각보다 멀다’는 말이 더 자연스러워진다.
제주시 생활 반경은 공항 주변 몇 킬로미터 안에서 거의 다 해결된다.
병원, 마트, 식당, 카페까지.
딱 익숙한 구역 안에서만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 밖으로 나가는 건 작지 않은 결심이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좁아진 거리 감각이
다른 지역에 가면 다시 넓어지는 점이다.
똑같은 30분인데도 제주에선 멀고,
육지에선 가까운 거리처럼 느껴진다.
결국 거리라는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생활 패턴과 감각의 문제다.
게다가 제주는 체감 거리만 멀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속도 제한도 한몫한다.
지도만 보면 가까워 보여서 ‘별거 아니겠지’ 싶지만,
실제로 달려보면 시속 50, 60 제한 구간이 많아서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거리보다 ‘속도’가 느린 동네다.
이런 감각의 차이, 나만 느끼는 건 아닐 것이다.
제주에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정도 거리도 멀게 느껴지네’ 싶은 순간이 온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누군가가 “서귀포 간다”고 하면,
본능적으로 말하게 된다.
“오, 거기... 좀 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