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모자란 수면. 잠든 상태로 씻으러 간다. 머리를 감고 말리면서 항상 드는 생각. 다음엔 짧게 잘라서 드라이 시간을 절약하자.
옷장에서 속옷을 챙겨 입는다. 오늘은 머 입지 하는 생각은 시간낭비다. 손에 잡히는 대로 몸에 걸친다. 어차피 무난한 검은색 맨투맨 티셔츠가 대부분이다. 주섬주섬 아이폰과 지갑을 챙긴다. “폰지갑시계열쇠” 출근 전 외우는 주문이다. 몇 해 전 열쇠는 번호키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신발에 발을 대충 걸친 채 현관문을 열고 나와 걸으면서 집어넣는다. 밤새 날 지켜주던 지붕을 벗어나 아침 공기를 느끼면 그제야 날씨가 어떤지 깨닫는다. 라이터 부싯돌을 칙칙하고 두세 번 돌리면 올라오는 젊은 시절 열정 같은 불꽃을 다른 한 손으로 꺼지지 않게 감싼다. 담배 끝을 불꽃에 대고 빨아들이면 지지직 하며 종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모금 들이마신 연기를 내뿜으며 시간을 확인하고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철역 도착 전에 담배꽁초는 이미 어딘가에 버렸다. 게이트 앞에서 정신없이 들려오는 삑삑삑 교통카드 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다. 공기 중에 울려 퍼지는 스피커의 안내방송과 소음이 이어폰을 뚫고 들어온다.
인파가 가득한 전철의 유일한 장점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는 것. 어차피 앉아서 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듯 밀려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부품처럼 끼워진다. 손잡이는 잡지 않아도 된다. 전철이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단체로 몸이 기울어졌다가 금세 균형을 잡는다. 부품 하나하나가 잘 맞으면 단단해지는 법. 그렇게 1시간가량 출근 전철 부품으로써의 책무를 다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다.
목적지에 당도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각각의 경쟁자가 된다. 나보다 체력도 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굉장히 스피드 하게 움직인다. 따라잡기 힘들 지경이다. 그렇게 전철역에서부터 경쟁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빛이 보이는 출구가 보인다. 빛은 하얗게 나를 감싸며 어서 오라고 반기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나는 빛을 등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결국 나를 이끄는 건 월세와 카드값이라는 빚. 그렇게 십수 년이 지났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고양시에 있는 습지 촬영을 갔던 날이었다. 출근 시간대의 전철이 지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밖에서 보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밖에서 보면.
지금껏 저 안에 있었던 난 밖이 얼마나 멋진 풍경인지 모르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