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단길만큼 신화가 많은 상권이 또 있을까? 2012년 언론이 처음으로 경리단길을 보도한 후 적어도 3번 서로 다른 경리단길 신화를 썼다. 성공 신화, 실패 신화, 그리고 부활 신화.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경리단길 신화도 진실과 환상이 섞여 있다.
먼저 성공 신화다. 경리단길은 이 길의 입구에 위치한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따온 이름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바로 옆 해방촌과 같이 외국인이 많이 사는 소박한 주택가였다. 경리단길에 처음 진입한 업종은 수제맥주와 골목길 기획업이다. 2010년 크래프트웍스를 시작으로 2011년 맥파이, 2013년 더부스 등 서울의 1세대 수제맥주 브루어리가 경리단길 입구에 자리 잡았다. 이와 별도로 장진우식당이 2011년 남산 중턱에 위치한 회나무길에 처음 진입한 후 연이어 식당을 오픈, 2014년에는 매장을 9개까지 늘렸다.
이 두 업종 중 대중에게 각인된 신화는 장진우식당이다. 장진우식당의 골목길 기획은 한 동네에 다수의 음식점을 열어, 그 동네를 개발하는 사업 모델이다. 경리단길 모델을 의미하는 전국의 수많은 '~리단길'에서 장진우식당과 같은 사업 모델로 골목상권을 기획한 기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골목길 기획업이 부상한 배경에는 2000년대 중반 출현한 골목상권 현상이 있다. 홍대, 이태원, 가로수길, 삼청동 등 1세대 4개 상권의 대표 콘텐츠는 각각 인디문화, 외국인 문화, 부티크숍, 한옥이다. 이태원에서 파생된 경리단길은 골목길 기획 중심의 상권 모델이다. 현재 전국에 들어선 160여 개의 골목상권 모두 5개 모델 중 하나를 따랐다. 골목상권 역사에서 경리단길은 리단길 계보를 시작한 중요한 상권으로 기록된다.
성공 신화보다 더 강력한 신화는 실패 신화다. 2016년이 지나면서 급성장의 후유증을 보이기 시작한 경리단길은 급격히 쇠락한다. 2018년 경리단길 1세대 상인인 연예인 홍석천이 예술가 활동을 중심으로 경리단길 살리기에 나섰지만 경리단길 침체를 돌이키지 못했다. 불황이 장기화되자 언론은 경리단길을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로 내세웠다.
하지만 경리단길 실패 신화도 신화다. 알려진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다. 임대료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대료가 상권 변화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임대료는 매출, 재료비, 인건비, 임대료 등 외식업자의 수익을 결정하는 4대 요소 중 하나다. 더욱이 임대료는 외식업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도 아니다. 비용 비중은 일반적으로 재료비, 인건비, 임대료 순이며, 창업 가이드북도 매출 대비 재료비 30%, 인건비 25%, 임대료 15%를 적정 수익구조로 제시한다.
임대료 변화와 상권 활력의 관계도 언론이 보도하는 만큼 간단하지 않다. 임대료는 2016년을 기점으로 안정세로 돌아섰고, 경리단길은 2018년 전반까지는 일정 수준의 활력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2018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리단길의 '몰락'은 임대료와 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사업자 수익을 결정하는 다른 요인, 즉 매출, 재료비, 인건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2016-2018년 사이에 급격히 상승한 인건비, 2018년 하반기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경기 하락을 상권 쇠락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변수는 상권 콘텐츠다. 같은 거시경제 상황에서 경리단길의 건너편 해방촌은 활력을 유지한 것을 보면, 경리단길 콘텐츠에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경리단길을 대표하던 수제맥주와 장진우식당이 보편화되면서 경리단길의 비교우위가 약해졌다. 경리단길이 해방촌과 같이 다른 상권이 복제하기 어려운 외국인 문화 중심으로 성장했다면, 콘텐츠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경리단길은 현재 세 번째 신화를 쓰고 있다. 2019년 이후 새로운 콘텐츠가 진입하면서 상권 회생의 가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경리단길 부활을 이끄는 앵커스토어는 2019년 오픈한 '에피그램 올모스트 홈셰어'와 2020년 오픈한 '보마켓 경리단길점'이다. 에피그램 올모스트 홈셰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에피그램이 운영하는 로컬 마켓이다. 주기적으로 로컬 브랜드를 소개하는데 2021년 상반기 로컬은 충북 옥천이었다. 막걸리, 두부, 계란, 딸기 등이 에피그램이 판매한 옥천 로컬 상품이었다.
보마켓은 현재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그로서런트 기반 동네 마켓을 개척한 기업이다. 일반 식품점에서 팔지 않는 기호 식품과 외국 식자재를 중심으로 품목을 구성하고, 식품점과 더불어 작은 카페나 식당을 운영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대형 할인마트, 온라인에 밀려났던 동네 마켓이 기존 시장이 채우지 못하는 틈새를 찾아 동네로 복귀한 것이다.
경리단길 청년 상인 중심으로 동네 문화 활동이 늘어나는 것도 고무적이다. 2020년 동네 재생 프로그램 '경RE단길 프로젝트'를 운영하기 시작한 문화기획사 비브라(Vibra)는 경리단길에서 많은 가능성을 본다. “뉴스가 전하는 상권 붕괴도, 원주민 이탈도 아직은 어림없다 말하고 싶습니다. 경리단길에서만 찾을 수 있는 로컬 가게들, 개성 있고 힙한 상점들, 다양하고 생생한 문화가 지금도 경리단길에 남아있습니다."
현재 감지되는 경리단길 부활의 키워드는 동네 마켓, 로컬마켓, 동네 연주회, 브런치 모임이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킨포크(Kinfolk)다. 킨포크란 "자연 친화적이고 소박한 일상 속에서 이웃과 함께 나누고 즐기며 여유롭게 사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를 의미한다. 경리단길이 킨포크에서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경리단길이 아직 완전히 회복했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중된 전국적인 오프라인 위기를 감안했을 때, 최근 경리단길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변화는 부활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이 변화가 지속된다면, 경리단길는 또다시 신화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번의 역할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가 아닌, 상권 콘텐츠 혁신의 대명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