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지역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 특히, 농촌 지역은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이 심각해 지역 공동체의 붕괴가 우려되고 있다.
전통적인 농촌 지원 방식으로는 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농촌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로컬 콘텐츠로 다양한 가치를 창출하는 크리에이터의 문화 창출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농촌 지역에서 크리에이터 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업이 ‘로컬 콘텐츠 타운’ 조성이다. 로컬 콘텐츠 타운이란 로컬 상권, 로컬 브랜드 생태계, 정주 여건을 보유한 인구 1,000~5,000명 규모의 농산어촌 지역 읍면 소재지를 말한다. 소멸지역에 건축, 디자인, 콘텐츠에 기반한 로컬 상권과 정주 여건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로컬 콘텐츠를 사업화할 크리에이터와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타운 조성의 목적이다.
로컬 콘텐츠의 힘은 이미 서울의 동네에서, 그리고 제주, 양양과 같은 지방 도시에서 증명됐다. '서울 안의 100개 도시'라는 표현이 말하듯이 서울은 다른 글로벌 도시와 마찬가지로 동네가 강한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서울의 동네가 항상 강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은 중심부와 변두리로 나뉜 평범한 도시였다. 외식이나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거주지를 떠나 시내로 가던 시절이다.
지금은 다르다. 슬세권(슬리퍼 차림으로 필요한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이란 단어가 유행하듯이 굳이 다른 지역에 가지 않아도 동네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서울의 동네 부흥을 견인한 것은 동네 문화와 로컬 콘텐츠를 바탕으로 골목상권이다. 골목상권은 2000년대 중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MZ 세대가 여행 가듯 찾는 곳이다. 2005년 홍대, 이태원, 가로수길, 삼청동 등 네 곳에서 시작, 현재 서울 전역에 예순여덟 개로 증가했다.
역의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 지역이 어렵다고 하지만, 지역소멸 위험을 극복한 지역도 많다. 최근 언론이 주목하는 지역발전 성공 사례는 양양과 제주다. 양양은 관광객이, 제주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양양과 제주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흥미롭게도 대기업 투자, 지역 혁신 시스템, 대규모 SOC 사업 등 전통적인 지역발전 방식이 양양과 제주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양양과 제주에 성공 방정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서 찾아야 한다.
청년이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두 곳의 공통된 성공 비결이다. 청년을 양양으로 유인하는 소프트 웨어는 ‘서핑’이다. 제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도 제주가 제공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이끌린다. 양양과 달리 제주 라이프스타일을 한 단어로 표 현하기 어렵지만, 제주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0년대 초반부터 많이 쓰이는 단어가 ‘보헤미안’이다. 예술가 성향의 자유로운 영혼이 각박하고 경쟁적인 대도시를 떠나 제주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양양과 제주의 성공 사례는 이처럼 서핑, 보헤미안 등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로 시작된 경제 활동을 로컬문화로 만들고, 이를 골목상권 중심의 로컬 콘텐츠 생태계로 육성하는 것.
두 도시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다.
마을 단위에서도 로컬 콘텐츠 성공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제주 구좌읍 세화리, 부여 규암면 자온길, 홍성 홍동면 유기농마을, 강릉 초당동 순두부마을, 양양 죽도면 서핑마을, 고창 상하면 상하농원이 대표적인 로컬 콘텐츠 타운이다.
문제는 로컬 콘텐츠 타운의 수다. 지역 소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을을 로컬 콘텐츠 타운으로 전환해야 하며, 정부가 정책을 면밀하게 설계하면 실제로 로컬 콘텐츠 타운의 수를 늘릴 수 있다.
정부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발굴하고, 이를 대상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정부가 1차 사업지로 선정해야 할 마을은 국립공원 입구마을,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집적된 역사문화지구(예: 영주 소수서원 부근), 경관과 생태 자원을 보유한 어촌과 수변마을, 한옥, 적산가옥, 단독주택 등 양질의 건축물을 보유한 건축마을, 산업화 가능성이 높은 특산물을 생산하는 마을(예: 풍기 인견, 홍삼) 등 문화 자원 보유 농산어촌 지역이다.
로컬 콘텐츠 타운 자체도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서울시가 이미 2022년 로컬 브랜딩, 건축과 거점시설 지원, 로컬 브랜드 발굴을 통해 잠재력 있는 골목을 단순 소비 공간이 아닌, 지역 특색이 반영된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조성하는 로컬 콘텐츠 중심의 로컬 브랜드 상권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로컬 콘텐츠 타운 조성 사업은 로컬 브랜딩, 건축디자인 지원, 로컬 메이커 스페이스 운영 등 크게 3개 사업으로 구성된다. 첫째, 지역 자원과 특색에 기반해 지역의 정주 여건과 로컬 비즈니스 환경을 설계하는 로컬 브랜딩 사업이다. 로컬 브랜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특화할 로컬 콘텐츠를 포함한 다양한 생활과 비즈니스 자원을 발굴하고 거점 시설, 커뮤니티 등 이를 사업화하는데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아 머물고 싶은 동네 조성에 필요한 동네 마스터플랜을 짜고 거점 시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행정안전부 로컬 브랜딩 사업, 로컬 컨셉 설정, 건축과 디자인 지원, 로컬 브랜드와 콘텐츠 발굴을 통해 소도시의 가치를 전파하는 코오롱 FnC 에피그램의 로컬 프로젝트, 로컬 여행지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신세계의 '로컬이 신세계다' 캠페인이 공공과 민간에서 진행되는 대표적인 로컬 브랜딩 사례다.
둘째, 상권과 정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건축과 디자인을 지원하는 것이다. 성동구가 성수동의 상징인 빨간 벽돌 건축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빨간 벽돌 건축물의 재생을 지원하듯이, 건축디자인 지원은 타운 건축 마스터플랜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개축하는 사업자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다.
로컬 콘텐츠 타운의 기본 건축환경은 도시와 다르지 않다. 농촌에서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건축자원, 보행환경, 문화시설, 크리에이터 커뮤니티가 매력적인 상권을 만든다. 도시에 비해 농촌마을에서 가장 부족한 자원이 건축물과 가로(街路)다. 개성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건축물과 걷기 좋은 보행로가 콘텐츠를 생산하는 로컬 상권의 기본 조건이다. 읍면 소재지 로컬 콘텐츠 상권도 적절한 수준의 건축자원과 보행환경을 보유해야 한다.
연희동 등 여러 지역에서 건축과 콘텐츠 공급을 통해 로컬 브랜드 생태계를 구축하는 어반플레이의 바운더리 프로젝트, 연희동, 연남동, 합정동에서 '작은 도시'를 기획하는 쿠움파트너스의 합정다인타운이 대표적인 건축디자인 기반 콘텐츠 타운 조성 사업이다.
셋째, 문화가 풍부한 농촌 읍면 소재지에 로컬 크리에이터와 콘텐츠를 육성하기 위한 '로컬 메이커 스페이스'를 운영하는 것이다. 로컬 콘텐츠 메이커 스페이스는 읍면 소재지에서 건축, 디자인, 식가공 기술과 장비를 통해 크리에이터와 로컬 콘텐츠 사업화를 교육하는 일조의 로컬 기술 지원 센터다.
오프라인 소상공인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온라인 쇼핑몰 운영 교육 프로그램, 온라인 셀러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하는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인삼 소공인들에게 인삼을 활용한 시제품 개발과 교육장, 스튜디오, 문화 공간 등 인삼 문화 콘텐츠 기획 시설을 지원하는 풍기 소공인복합지원센터, 지역 농업인과 함께 다양한 농산물 가공 공방을 운영하는 고창 상하농원, 군산 영화동에서 골목 창업자를 위한 공간, 디자인, 식가공 기술 개발 작업장을 운영하는 (주)지방의 '로컬 콘텐츠 메이커 스페이스'가 로컬 메이커 스페이스 기능을 수행한다.
로컬 콘텐츠 타운은 단순한 관광지 조성을 넘어, 지역 고유의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역의 문화, 역사, 특산물 등을 활용해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목표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디지털 기술과 콘텐츠 산업이 주목받고 있는 만큼, 로컬 콘텐츠 타운은 지역 자원과 첨단 기술의 융합을 통해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산업단지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로컬 콘텐츠 타운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지역 발전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소멸지역 ‘로컬 콘텐츠 타운’ 사업의 역사적 의미는 새마을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시멘트와 철근을 공급해 농촌의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농촌 주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대표적인 지역 개발 사업이다. 2020년대 콘텐츠 타운 조성 사업은 새마을운동과 달리 콘텐츠와 디자인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농촌에 시멘트와 철근을 공급했다면, 2020년대 로컬 콘텐츠 조성 사업은 콘텐츠와 디자인을 공급해야 한다.
이 사업의 가장 큰 차별성은 시대정신이다. 지역 경제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탈산업화, 창조경제, 라이프스타일 변화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현대 경제에서 콘텐츠와 디자인은 지역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다. 콘텐츠와 디자인을 통해 지역의 특색을 살린 상권과 정주 여건을 조성하면, 지역의 매력이 높아지고 관광객과 투자자를 유치하는 자원이 된다.
로컬 콘텐츠 타운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의 개발이 필수적이다. 단순히 도시의 콘텐츠를 그대로 가져다 놓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 지역의 문화, 역사, 자연, 특산물 등 지역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지역 주민의 참여와 협력도 성공의 핵심 요소다.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진다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로컬 콘텐츠 타운 사업은 장기적이고 복잡한 사업인 만큼,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이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를 개발하고, 지역 주민의 참여와 협조를 이끌어내며,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컬 콘텐츠 타운은 미래의 농어촌을 위한 혁신적인 시도로, 소멸의 위기에 처한 지역에 생기와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콘텐츠와 디자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 농촌의 새로운 모델은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크리에이터소사이어티
* 기획회의 601호에 실린 '2024 로컬 담론' 특집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