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로 살기(3)
우리는 우리가 얻는 것으로 삶을 꾸려 나간다.
우리는 우리가 주는 것을 통해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we make a living by what we get, we make a life by what we give.
<윈스톤 처칠 Winston Churchill>
시니어로 나이 듦과 함께 인생을 조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꼰대'라는 말 때문이었다.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경험법칙의 하나다. 지난해 꼰대라는 말이 다시 유행한다는 뉴스를 듣고 나서 놀랍지는 않았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꼰대로 되는 것일까? 진짜로 이 생각은 진실일까?
젊은이들은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이 든 사람,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신념을 강요하는 어르신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예전에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어려운 것을 잘 몰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꼰대는 자신만의 관념과 경험에 갇혀 사는 답답한 시니어를 비꼬는 말이다. 청년시절을 돌이켜보니 꼰대라는 말이 희귀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니어 세대로 진입한 나로서는 이런 현상이 몹시 불편하다. 왜 그런 것일까?
나이 듦이 꼰대를 만들까? 음, 따져보자. 나이 듦은 시간과 경험의 축적이다. 시간은 경험을 낳고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가치와 신념을 얻는다. 가치와 신념은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정체성은 삶을 지탱한다. 세상을 살면서 가치가 모호하거나 약하다면 온전한 삶을 살기는 힘들다. 또한 경험은 세상살이를 위한 지혜를 낳는다. 이 점에서 나이 듦은 자연현상이면서 인생의 축복이다. 내가 이 사실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젊은 시절에 깨달았으면 하는 지혜를 돌이켜 보지 않는 어른은 없다.
그럼에도 꼰대는 있다. 제법 많다. 가치와 신념에 동반하는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와 신념이 강할수록 다른 가치와 신념을 배제하기 쉽게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용인하기란 황희 정승이라면 몰라도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가치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준다.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고집스럽고 다른 가치와 신념에 닫혀 있는 것은 이런 감정들 때문이다. 그렇다면 꼰대는 인간에게 불가역적인 현상인가? 다른 경험은 소통의 장벽을 만들게 마련인가?
나이 듦은 분명히 이해와 소통의 장벽을 만든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는 비슷한 사회문화적 경험이 동질성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수십 년의 간격, 세대차이가 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마저도 없다.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중고등학생들에게 20세기 초 유럽인들이 겪어야 했던 세계대전과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 그들의 선택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무척 힘들었다. 21세기에 태어나고 자란 청소년들에게 당시 유럽인들이 마주했던 삶의 엄청난 무게와 자유에의 갈망을 이해시키기란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꼭 세대가 달라야만 꼰대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직장인을 위한 야간대학원을 같이 수학한 동문들이 있는데 나이차가 제법 나는 동문들이 많다. 그래도 나이 차이는 10년을 넘지는 않았는데 동문들에게서 꼰대스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함께 공부할 때가 2000년대 초로 몇몇 분을 빼고는 한창때인 30대~40대로서 당시에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던 동문들에게서 말이다. 그 시점은 정기적으로 동문 모임을 하던 중에 이제 은퇴를 한 동문들이 많아졌던 5-6년 전부터였다. 이제 60대를 넘긴 동문들은 대체로 말이 많아지고, 이들이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런데 대화는 늘 과거 속에 있고, 새로움보다는 낡은 것에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경험이 증언하는 내용으로는 세대 차이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은 분명히 상당하게 있다. 또한 소통의 장벽을 만드는 나이 든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다. 그러하면 어차피 나이 듦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언정 꼰대로 진화(? 혹은 퇴보)하는 것일까?
나는 꼰대로 불리기 싫다. 소통 가능한 어른이 되고 싶다. 독자들은 "꼰대가 되고 싶은 어른이 있을까요?""라고 질문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진지하게 소통하는 인생을 생각해 본 어른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꼰대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나도 그럴 수 있다'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 불안감은 뿌리가 있다. 나는 다른 세대와 단절된 삶이란 불완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소통의 단절은 다양하고 풍부한 삶을 구성하는 대화와 접촉의 단절이다. 스스로 고립을 원할 수는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불완전하다.
꼰대가 유행하는 현상을 보며, 나는 내면의 불안감을 감지했고, 시니어로서의 인생을 나이가 들어 그냥 마주하는 삶이 아니라 미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시니어의 인생은 사람의 인생에서 입구보다는 출구가 더 가깝고, 그러니 무엇인가를 추구하기보다는 잘 남기고 잘 마무리하는 시각에서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한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삶에 가깝게 최대한 살아 보는 것 아닐까? 그러자면 앞으로 마주할 삶을 그려보고, 행복의 요소를 따져보고, 전 인생에서 미처 구현하지 못한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20대에는 삶의 가능성을 막연하게 받아들인 가운데 행복을 생각했다면, 이제 삶의 빛과 그림자를 경험한 시니어에 이르러서 다시 행복을 생각해 보는 이유다. 그 행복은 같을까? 다를까? 나는 어느 정도 흥분한 가운데 행복을 생각해 보았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고 추구한다. 그런데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해서 단 하나의 답변은 있을 수 없다. 삶의 주인은 온전히 각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 가치라는 점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의 가치다. 부유함, 명예, 권력 같은 가치들도 있지만 이들 모두는 궁극성이 없다. 그 자체로는 목적이 아니라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다. 행복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다. 행복은 인간에게 제1의 가치다.
그런데 실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행복에 담겨야 혹은 담아야 하는 내용이다. 무엇이 행복을 구성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인간에게는 존재로서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나는 경험의 질과 관계의 깊이에 행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체험하는가? 그 체험이 주는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은 부족하지 않고 충분한가? 경험을 통해 사람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이 있는 순간에 자신을 느낀다. 경험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시니어로서 내가 맞이하는 경험, 느끼고 싶은 경험은 무엇일까? 그것이 행복을 그려 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모자이크와 비슷하다 라고 말했는데 그는 멀리서 볼 때라야만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지만, 나는 아마도 경험이 행복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뭐, 무엇이라도 좋다. 나는 충만한 경험, 원하는 경험, 의미를 주는 경험을 하고 싶다.
또한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즉, 관계는 사람의 존재 조건이고 양식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를 보면 무인도에 불시착한 주인공(톰 행크스)이 제일 힘들어한 것은 배고픔도 아니고 추위도 아니고 '고독'이었다. 그래서 윌슨(배구공)과 대화하는 톰 행크스는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와 만나며 누구와 관계하는가? 슬픔보다는 기쁨을 많이 느끼는 사람, 고독보다는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절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아니라 삶에 의미를 더해 주고 행복한 감정을 나누는 사람-과 관계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경험과 관계의 내용과 깊이가 행복이라는 모자이크의 날실과 씨실이다.
그런데 이 행복은 나이 듦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우선 나이는 행복과 무관한 듯 보인다. 사람은 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복과 소년의 행복, 중년의 행복과 노인의 행복은 똑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이는 행복과 관련이 있다. 앞서 말한 이유와 모순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진실이다. 나이에 따라 행복의 내용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에 따라 삶의 조건은 달라진다. 이 조건이 삶의 경험을 다르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목표, 영역, 가치와 정서는 달라진다. 개인에게도 그렇고 넓게 보면 세대에도 적용된다. 세대에 따라 행복의 내용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한다.
청년 세대의 행복: 이 세대는 자아를 발견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와 숙련을 시작하는 세대이다. 삶의 영역에서는 가정에서 사회로 확장하는 세대이다. 공부하고 자격을 얻고, 경력을 선택하고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찾고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성장과 우정은 중요한 행복의 내용이 된다.
시니어 세대의 행복: 시니어에게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 시니어는 자아를 찾았고 준비와 숙련의 시기를 거쳤다. 직장인으로든 전문가로든 경력을 만들어 왔고, 가족과 동료라는 삶의 영역을 만들어 왔다. 그 영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나름의 기여를 통해 의미를 얻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런데 시니어가 되었다. 자부심과 의미의 바탕이었던 경력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지위는 없어졌거나 곧 없어진다. 혹은 급작스러운 은퇴로 인해 지금까지 안정적인 울타리이자 의미를 느꼈던 영역을 떠날 준비가 부족한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가족은 인생의 바탕이었고 둥지였고, 어려움을 이겨냈던 원천이었지만 이제 자녀들은 독립해야 하고 부부관계도 다른 맥락에 놓여 있게 된다. 혹은 가족과 이별한 경험을 겪은 사람도 있다. 열정을 담아왔던 몸은 큰 변화를 겪었다. 기력은 청년 같지 않고 여러 번 병을 겪어 왔거나 없더라도 두려워하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모든 사람의 인생 속에 놓여 있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는 것을 슬슬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행복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 행복한 삶은 경험의 질과 관계의 깊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결국, 시니어의 삶의 조건에 부합하면서 경험의 질을 높이고 관계의 깊이를 더해 주는 삶의 영역을 재구성하는 것에 답이 있지 않을까?
인간은 처음으로 생명을 얻고 그 뒤에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고 삶을 만들어 나간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이 보편적인 조건에 더해서 나이 듦에 따른 조건이 더해진다. 이를 단적으로 말하면 반쯤 색이 칠해진 도화지라는 것이다.
시니어는 청년세대와 삶의 조건이 다르다. 그것은 경험을 했다는 것,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점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이러한 삶의 조건과 부합하는 삶이다. 이 조건에서 경험과 관계를 질과 깊이를 더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어떤 시니어들은 은퇴했다는 생각, 편안한 노후생활을 한다는 생각,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 이해할 만하다. 이런 생각 아래에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 그간 미뤄 둔 경험을 찾으려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시니어로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성찰을 거친 생각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생각이 머물러 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휴식과 안정에 대한 욕망이 앞서 있다.
이러한 삶이 하나의 대안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이러한 삶은 삶의 조건과 부합하지 않고 궁극적 가치로서의 행복을 실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삶을 다 마쳤을 때 행복했다고 말하려면 언제나 행복함에 대한 민감성을 의식하고, 할 수 있는 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행복추구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최고의 선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행복은 언제나 삶의 조건과 부합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나는 바로 이것이 제2의 인생을 찾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1의 인생은 자격과 능력을 얻는 삶이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목표를 설정하며, 커리어를 시작하는 인생이다. 제2의 인생은 발견과 성찰을 거친 또 하나의 생이다. 시니어로서 보다 넓은 지평에서 인생을 생각해보고 진정한 가치대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삶으로서 제2의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삶의 변화와 대안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동의할 만한 원칙이 있다. 그것이 어떤 삶이더라도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충만한 삶이란 자신의 가치대로, 바람대로 최선의 경험을 하는 삶이다. 아쉽다거나 후회된다거나, 갈등이나 결핍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 이 세계에서 자신의 바람을 실현하는 삶이다. 길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충만함이라는 목적지는 같다.
시니어에게 행복한 삶의 방향은 충만함을 깊이 느끼고 경험하는 삶이다. 그 삶은 시니어의 삶의 조건에 부합하는 삶이다. 나는 이 생각에 이르러 인생의 가능성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느꼈다. 청년기는 늘 소망하고 계획하고 행동했다. 열정에 거주지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열정은 안전함과 평온함에 마음속 큰 방을 내주고 골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추구한 열정의 결과, 성공과 실패들, 관계 속에서의 기쁨과 슬픔에 지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만한 삶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열정을 부르는 것 같다. 시니어의 행복한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영역에서 삶을 펼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축적한 지혜와 경험을 활용해서 보다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