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로 살기(4)
16세기, 두 명의 위대한 작가가 있었다. 한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의 사랑과 존경 속에 천재로 인정받았고, 현재도 가장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는다. 다른 한 사람은 무척 고루한 삶을 살았다. 출세하고 싶었으나 많은 실패를 했고,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살았다. 또한 부상을 당했으며 교도소에서 보낸 세월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단 하나의 작품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고, 이 작품은 근대소설을 창조한 효시로 평가받게 된다. 그가 이 소설을 창작한 곳은 감옥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세르반테스이고, 그 작품은 <돈키호테>다. "돈키호테는 나를 위해 태어났고 나도 그를 위해 태어났소. 그는 행동을 하고 나는 기록을 하는 것이오……. 그리하여 우리 둘은 하나인 것이오. 안녕히!"(돈키호테 2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널리 알려진 말이다. 나는 이 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길다! 현대인은 40년간 일하고 은퇴한 후에도 40년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제법 길다. 그만큼 인생에서 채우고 경험해야 할 것은 많아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로 도화지 공백처럼 남아 있는 삶을 채우는 일이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지 혹은 남겨 둘 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재료는 기억, 이성, 그리고 상상력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 정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류가 남긴 지식을 구분하면서 기억, 이성, 상상력을 기준으로 제안했는데 나는 의미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채우는 것은 결국 정신 아닌가?. 그렇다면 이 재료로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런 인생의 그림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또한 어떤 인생의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린아이의 그림과 청년의 그림, 그리고 시니어의 그림은 주인공과 풍경, 주제와 색깔이 다를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도화지를 주면 주로 가족을 그리거나 동물을 그린다. 무엇을 그리든지 이것은 예습이다. 잘 그리지 못하면 다시 그리면 된다. 연습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인생이라면 예습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어떤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미리 준비해 볼 수는 없다. 삶이란 선택하고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견디면서 보내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항상 중립적이다. 선택의 결과는 그 사람에게 좋을 수도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좋지 않았다면 후회와 연민이라는 성적표를 받고, 좋았다면 만족감을 상으로 받는다. 이런 인생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삶의 조건, 예습이 불가능하다는 이 조건이 삶에서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예습이 불가능한 삶은 불안하다. 선택에 이르기까지도 그렇고 선택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다. 불과 200여 년 전에 내가 태어났다면, 나는 왕족이거나 귀족이거나 기사 거나 아니면 농노로 살아갔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왕족이나 최소한 귀족이었기를 바라지만, 확률적으로는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삶은 인간에게는 불안감이 적은 시대였다. 주어진 위치, 신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현대 사회는 완연히 다른 사회다. 현대는 다른 어떤 시대, 사회보다 선택에서 열려 있는 사회다. 현대인은 태어나서 배우고, 직업과 경력을 선택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삶을 선택한다. 그리 오래돼지 않은 사회에서 가문은 삶의 보호막이었고, 지역은 작은 공동체로서 개인을 돌봐줬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 우리는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한다.
그러나 예습할 수 없는 삶은 축복이 숨어 있는 삶의 조건이다. 예습한다는 것은 정답이 있다는 뜻이고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예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나는 내 희망과 능력, 그리고 철학에 따라 삶을 선택할 수 있다(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은 내가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나의 삶이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며, 나의 자부심을 훼손당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이 조건이 축복임을 알려주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삶은 복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잘못된 곳에 도달한 것이라면, 방향을 바꾸고 다른 여정을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복습이 가능한 삶의 조건은 조금 늦게야 인간에게 다가온다.
시니어는 삶을 복습할 수 있는 시기에 도달한 사람이다. 대개 나이로-50세 이후, 혹은 60세 이후 등-시니어를 구분하는데, 내가 정의한 시니어는 이런 사람이다. 시니어는 인생을 복습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을 몸으로, 마음으로 겪어 온 사람이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현명한 길은 무엇보다 인생의 조건에 맞추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조건은 삶에 놓인 무대이자 맥락이다. 청년의 삶과 노년의 삶이 다른 것은, 그리고 달라야 하는 것은 바로 인생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청년은 인격을 갖춘 시민으로서 자격과 인정을 얻는 것이 조건이다. 그래서 배우고, 시도하면서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찾고, 삶의 영역을 찾는다. 시니어는 청년의 삶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역을 찾고, 사람들과 관계했다. 이제 시니어는 기억과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앞으로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인생의 조건이다. - 바로 복습하는 삶!
시니어가 겪은 삶은 인생에 대해 무엇인가 말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낳았다. 이 지식과 경험을 복습하는 계기는 오직 시니어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복습하고, 그 복습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의 재해석이 복습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고 경험한 것, 곧 나에 대한 인식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 말이다. 단지 하지 말아야 할 것, 했어야 하는 바람의 투사가 아니라 삶의 경험에서 배운 것을 앞으로 살아갈 조건에서 재구성함으로써 나를 그리고 삶을 새롭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지식과 경험은 단지 축적되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좋은, 향상된 삶에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꼰대를 나누는 지점도 이 지점이 아닐까? 내게 있는 것은 언제나 좋고 중요하다는 그 고집 말이다. 재해석과 재구성만이 새로움을 만들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중요한 질문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을 진정으로 바랬는가?
무엇을 실현하고 싶은가?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삶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험
경험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사실, 어떤 기억도 그냥 기억이 아니다. 어떤 기억은 골동품처럼 먼지가 뒤집어쓴 채로 남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감춰진 보물일 수도 있다. 다만, 보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할 뿐이다. 안목은 새로운 관점이다. 즉, 과거 경험을 앞으로 마주할 경험이라는 눈으로 재해석할 때, 삶에서 새로운 경험을 만드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는 기구한 삶 속에서도 평생 독서하고 글을 썼다. 평생 간직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삶의 바탕이었다. 그는 이 바탕을 간직하면서 전쟁에서 싸우고 노예로 팔렸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툰 인생의 쓰라림을 작품으로 승화했다.
시니어가 쌓아 올린 인생 경험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삶은 늘 계속된다). 그 경험이 무엇이 되는 가는 앞으로 살아갈 삶의 경험에 따라 새로운 것이 된다. 나는 내가 쌓은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경험이 어떤 새로운 경험을 낳을 수 있을까? 경험의 의미는 나중에 정해진다.
경험의 재해석은 지금 기억하는 경험을 고집하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의 경험을 찾는 재료로 경험을 사용하는 것이다. 간호사, 연기자, 변호사로 일한 다이애나 샤프(Diana Sharpe)라는 영국 여성은 자신의 다양한 경력을 경험의 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경험에는 종착점이 없으며 "거기에는 오랜 세월 쌓인 경험의 층들이 단단히 결합하여 만들어진 역동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타인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며, 억울한 사람들 도와주는 일은 경력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그녀를 드러내고 가치를 실현하는 경험이었다. (찰스 핸디,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뮤진트리, 2011). 멋진 생각이다.
일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에게 일은 이제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까? 일은 생계를 위한 피곤한 노동일 수도 있고, 삶의 해방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든 시니어에게는 일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주어져 있다.
일은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경로를 가진 하나의 선택이다. 즉, 직업과 일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직장인으로 일했든 전문가로서 일해 왔던지, 일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체계-직업의 체계-에서 하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일마다 다른 보상이 지위와 자격을 정해주었다.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하는 것을 보면 이 점은 분명하다.
시니어는 이런 경로를 거쳐 왔지만, 이제 이 경로를 원하는 대로 연장하는 것은 어렵다. 일에 필요한 역량은 늘 변해왔고 과거에 축적한 시니어의 경력이나 역량은 점점 더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일부 대학이나 사회 부분에서는 훌륭한 역햘을 수행하고 있는 시니어도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흐름은 거역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를 수용하고 포기하란 말인가? 결코 아니다. 일은 청년이나 시니어, 남성이나 여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삶에 똑 같이 중요한 영역이다. 다만, 그것을 찾고 얻어내는 방식에서 현명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시니어로서 일을 원한다면 이제 일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즉,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로가 아닌 다른 기준 말이다. 나는 가치와 기여를 기준으로 제안하고 싶다.
즉, 지위와 보상이 아니라 그 일이 직접 만드는 가치를 기준으로-그것도 자신을 포함해서 지역공동체와 사회의 시각에서- 일을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경제학에서는 직업, 지위와 보상이라는 틀로 일을 생각한다. 따라서 일이란 오직 교환가치로만 보인다. 일의 가치가 왜 지위와 보상으로 주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시장에서 가치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통하는 가치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일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시니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일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대기업 임원인 나의 친구는 주말마다 교회에서 봉사한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어린 친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신을 뿌듯해한다. 봉사라고는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서 일하고 있다. 어떤 시니어는 자신의 역량과 경험이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을 오랜 기간 찾다가 사회적 기업에서 자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시니어는 기업고객을 발굴하는 마케팅을 자문하고 있다.
관계
누구와 어울리는가는 정서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영역을 만들어준다.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관계란 서로가 영향을 미치며, 서로가 성장하도록 돕는 인간 간의 교류이다. 이 교류는 물질의 교환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의 교환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서로 위로받고, 편안함을 느끼고, 지적 자극과 흥미로 정신을 새롭게 하고 삶을 배운다. 또한 관계는 삶을 확장하는 소중한 수단이기도 하다. 혼자만 생각해서는 알 수 없던 것을 타인을 만나서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기 생각을 제대로 보게 되고, 자신의 정신이 타인의 정신을 만나 그 타인을 변화시킨다. 결국,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삶을 넓히는 것이다.
시니어는 많은 시간을 들여 시간과 의지를 투자해서 관계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이제 시니어에게는 진정으로 확장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주어져 있다. 그 이유는 시니어는 먼저 나눠 줄 것이 있고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니어는 이제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관계 자체를 목적으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대를 넘어, 지역을 넘어 시니어는 관심과 호기심이 이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시니어의 지식과 경험은 젊은 세대를 위해, 그가 한 경험을 아직 하지 못한 사람에게 자극이고 공기며 신선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시니어에게도 이런 관계는 의미를 더해 준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경험, 낯섦을 만나 자기 생각과 경험이 갖는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다. 곧 삶의 경계와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니어는 젊음을 닮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정신을 새롭게 하고 관계 속에서 새로움과 호기심을 유지하는 한 정신은 젊다. 이것이 진정한 젊음이 아닐까?
이렇게 삶을 재해석하게 되면 삶의 맥락이 새롭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삶의 맥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삶을 재해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 기억과 경험, 내가 만나온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큰 고민 없이 받아들인 시니어의 조건(은퇴, 사회적 관계의 축소, 나이 드는 몸 등)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인생이란 도화지에 어떤 주제로 그림을 그릴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주제가 곧 맥락이다.
삶의 맥락이란 살아가는 인생의 무대와 영역, 그 영역에서 주로 생각하는 가치와 우선순위를 말한다. 필자로 말하자면 결혼, 가족, 아이, 직장, 기업, 경영 등이 40대 중반까지 삶의 맥락이었다. 삶의 맥락은 사실, 감추어진 삶의 실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삶의 맥락은 전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맥락은 대부분 주어진 것이고 어느 정도 살아 보고 나서야 사람은 맥락을 선택할 수 있다. 우선 그 누구도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다. 가족과 고향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직업과 경력은 선택을 통하므로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범위와 조건은 사회적 맥락 안에 있다.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회에 없는 직업을 선택할 수는 없다. 이런 맥랑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좀 더 유리해 보이는 직업을 선택한다. 서울대에 진학했지만 음악을 선택하고 훗날 방탄소년단(BTS)을 키워낸 방시혁 대표는 예외적인 인물이다. 인간은 먼저 주어진 맥락에서 적응하고 견뎌내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맥락을 바꿀 기회가 인생에는 주어진다. 특히 시니어는 스스로 삶의 맥락을 만들 수 있다. 삶에 대해 경험하고 이해했다는 사실, 즉 복습할 수 있다는 삶의 조건이 맥락을 구성할 수 있는 바탕을 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시니어라면 당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그 일이 만드는 가치와 범위를 선택할 수 있으며, 당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 수 있으며, 관계를 통해 얻고 싶은 경험을 만들 수 있다. 즉, 당신은 당신이 경험할 삶의 맥락을 구성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걸어온 삶, 겪어온 인생을 재해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의 맥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인생을 복습해 보면서 생각해 보고, 또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았다. 그것은 충만함이다. 가득 참, 비어있지 않음..... 이 말은 어떤 뜻일까? 그다지 어렵지 않다. 때때로 어둠이 빛을 더 빛내 주는 법이다. 충만함의 반대는 공허함인데, 이것은 삶에서 무엇인가 빠진 것을 뜻한다. 십여 년 전에 대표로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사업체를 세우고 열심히 일했지만 잘 되지 못하고 접어야 했을 때, 인생 첫 책을 쓰고 나서 생각보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크지 않았을 때, 큰 딸이 대학 수학을 위해 독립해서 기숙사에 들어가고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부모보다는 딸이 잘 적응하는 것(?)을 보면서 공허함을 느꼈다. 공허함은 실질적인 감정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공허함은 충만함보다 강하다. 만일 당신이 은퇴나 나이 듦으로 인해 공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실한 감정이고, 이 진실함을 자책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공허함은 삶에 무엇인가를 채워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 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채우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무엇으로 채울까를 생각할 때, 당신의 삶에서 복습한 내용을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나름 살아왔다는 것, 견뎌내고 참아왔다는 것, 도전해보고 실패하고 성취하고 살아남았다는 것, 그럼으로써 인생을 복습할 수 있다는 것, 이 복습을 통해 충만한 삶의 맥락을 구성할 수 있다.
인생을 복습하는 계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이만큼 살아왔으니 이제 기억과 이성으로 삶을 복습할 수 있다. 그리고 진정으로 바라는 삶의 맥락을 상상하는 것이다.
“나는 한때 젊었고 홀로 떠돌았고 길을 잃었다.
나는 누굴 만날 때만 풍요로워진다, 인간의 기쁨은 다른 인간이다. “
<높으신 분이 말하기를, Hávamál 하바말(영어: sayings of the high one),
바이킹 시대의 고대 노르드어 시집인 고 에다에 속해있는 시 중 한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