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로 살기(5)
나는 미끼를 정확하게 놓지. 단지 나한테는 더 이상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오늘은 운이 따를지 말이야.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니까. 물론 운이 따른다면 좋겠지만 나는 정확한 편이 좋아.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준비를 갖춰 놓고 맞이할 수 있으니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나는 중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거친 대양에서 파도와 비, 폭풍, 그리고 상어 떼와 싸우는 노인의 이야기. 당시에는 내 나이와는 너무 먼 사람의 이야기라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모습만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결국 오랜 고생 끝에 잡은 물고기를 상어 떼가 먹어 치우고 앙상한 뼈만 얻었지만, 끝까지 싸움을 계속하는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큰 것인가? 시니어를 지난 지금은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노인은 캐릭터를 넘어서는 위대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어느 정도 세월을 겪어왔기 때문일까? 내가 무엇인가를 위해 열정을 불태워본 적은 언제였던가? 그처럼 물러서지 않고 성취하고 싶은 무엇이 내게 있는가?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시니어가 되었다는 자각이 들고 나서 강렬하게 마음에 떠 오른 생각이 있다. '나이에 맞는 생각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왜 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전까지는 삶에서 마주하는 과제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마음과 몸도 바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인생은 내가 생각해야 하는 과제들이 주욱 이어져 왔다. 나는 선택을 해 왔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나이에 맞는 생각'을 궁금해하고 있다. 인생을 만들기보다는 정리하고, 의미를 채우고, 남겨야 할 유산을 만들고 싶다는 의식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수십 년 동안 다져 온 인생의 단계-가족을 이루고, 직장을 선택하고, 경력을 만들어 온 시기-가 어느덧 지나갔기 때문이듯도 하다.
그렇다면,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해보자.
처음에는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여러 목소리, 여러 감정, 다양한 주제로 변주되는 이야기들이 마음속에 들어있음을 느꼈다. '아직 이루지 못한 몇 가지 일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하지 못했다, 이제는 적은 사람들만이라도 깊은 교제를 하고 싶다.' '아직 배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이자 선배로 도와줘야 한다.' 우리 사회 어른으로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한 작은 기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4차 산업혁명이든 새로운 기술혁명이든 달라지는 세상에서 새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는 각자에게 자아가 있으며 자아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나는 나의 개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 생각은 올바른 생각일까? 왜 꼭 나는 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오직 나'라는 생각은 나는 모순이 없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인데, 나는 이 나이를 먹기까지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다양한 관심이 있었고 변덕스러웠으며, 다양한 일에서 능력을 발휘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왔다. 삶의 영역도 다양했고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영역도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한 가지 색깔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나에게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있으며, 경험하고 또 실현하고 싶은 삶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최소한 내 마음속 생각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속에는 청년과 노인이 있다. 둘은 각각 건재하며 각자 말한다. 마음속 소년이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이 아니다.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이다.
청년은 호기심과 가능성에 열려 있고 늘 욕망하는 존재다. 노인은 돌이켜보고, 위험과 안전을 분별하며, 다소 느긋하게 욕망을 자제시키는 존재다.
이 둘은 언제나 내게 있었다. 다만 나의 인생에서 시기마다 한 존재가 더 큰 목소리로 말하고, 더 큰 힘으로 나를 행동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두 존재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
청년의 개성은 무엇보다 호기심과 배우려는 자세에 있다. 청년은 자신과 사람과 세상에 대해 늘 열려 있으며 궁금해한다. 세상에 대해 판단하기보다는 경험하려 하고, 새로운 상황에 두려움 없이 쉽게 뛰어든다. 이 과정이 항상 안전하지는 않은지라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젊음의 본질은 그 아픔을 이겨내게 한다. 청년은 아프고 행복하면서 차츰 자신이 추구할 삶의 목표와 의미를 발견한다.
또한 청년은 배우려고 한다. 배움은 주로 학교에서 이루어지지만, 학교가 배움을 주는 전부는 아니다. 청년은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서도 배운다. 팽팽하게 뛰는 심장과 뜨거운 머리를 가진 청년은 그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스승을 만난다. 세상이 텍스트이고 세상이 질문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사람들은 왜 기뻐하고 슬퍼하는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속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청년은 배운다. 자전거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 앞으로 달려야 한다. 청년의 삶은 자전거를 타는 삶과 비슷하다. 청년에게는 늘 바라고 추구하는 무엇이 있다. 바로 이것이 청년을 청년답게 한다.
마음속 청년은 노인에게 말한다.
지금 무엇을 열렬하게 추구하는가? 과거에 열렬하게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만일 그것이 없다면 왜 그것을 잃어버렸는가를 묻는다. 나는 10대 시절에 추리소설에 탐닉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매주 학교 앞에 있는 책방에서 홈즈와 루팡이 나오는 추리소설을 대여해서 읽었다. 책을 읽는 이 시간은 소년 시절의 내가 가장 기다리고 애정 했던 시간이었다. 달콤하고 황홀했다. 홈즈가 실타래처럼 얽힌 사건을 풀어갈 때 느끼는 청량감과 쾌락!, 홈즈가 루팡과 만나 대결하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12살 소년에게 놀라운 감정이었고 경험이었다.
20대에는 사회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386세대(이제는 586)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에 대해 분노했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렸다. 사회 변화를 위해 행동한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내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의식은 나를 성숙시키기도 했다.
나는 한때 뜨거웠고 마음이 바빴으며,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고 채워진 삶을 살았다. 청년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데 지금도 마음이 뜨거운 가는 질문에는 궁색해진다. 그리고 공허감을 느낀다. 왜 지금의 나는 뜨겁게 추구할 무엇이 없을까?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경력과 지위를 얻고 가족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지금 열정을 잃어버릴 이유는 아니다. 변명거리는 되겠지만.
또한 청년은 묻는다. 지금 새롭게 배우는 것이 있는가? 정신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하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얻고 있는가? 단지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니라 후배 세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지식과 경험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 청년은 노인의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지만 지금 시대와 곧 닥쳐올 미래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지식인가를 묻는다. 지식의 가치는 진부함에 있다. 새로운 지식이 과거의 지식을 바꿀 수 있을 때 진정한 지식이 아닌가를 묻는다. 혹시 당신은 천동설을 아직도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청년의 질문에 나는 움찔했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기가 두렵고 버겁다는 마음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믿는 지식을 고수하고 지키려는 마음을 들켰기 때문이다. 혹시 나는 더 이상 배울 수 있는 지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배움을 멈출 때 정신도 멈추고 의욕도 멈추는데.
청년처럼 빨리 배우고 익히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요즘 책을 읽고 나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많은 내용을 망각하는 나를 보면 말이다. 그런데 배우고 익히는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는 고유한 능력이다. 인간의 기억, 이성, 상상력은 나이를 먹으면서 비록 강도는 약해졌을지 몰라도 언제나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끼처럼 글을 수 시간 동안 연속해서 쓸 수 있는 체력을 위해 매일 운동에 투자하지는 않지만, 내게도 아직 학습능력이 있다.
문제는 학습에 대한 의지다. 그 의지는 도구로서의 배움(시험에 합격하고 취직하고 승진하기 위한)이 아니라 그 목적 자체, 즉 그 자체로 배우려는 욕구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배움을 멈출 때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뒤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지동설을 모른다면 천동설을 부정하기 어렵다. 거인국에 가보지 않았다면 나보다 큰 인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이제 노인이 질문한다.
노인은 청년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내가 분노하기를 멈췄을 때 비로소 노인이 되었다"라는 어느 노벨상 수상 학자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노인은 느긋하게 삶을 바라보는 여유, 혹은 냉정함을 가지고 있다. 분노하기보다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노인에게는 있다. 여유 속에는 포기 혹은 냉소가 담겨있을 수도 있지만, 노인은 삶에 대한 넓은 이해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노인에게는 인내심이 있다. 마음속 세상과 실제 세상은 다르다는 것, 사람이란 어느 정도는 약점이 있고 많은 실수를 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고 그 상황을 인내할 수 있다.
노인이 청년에게 말한다.
지금 왜 그렇게 마음이 바쁜가? 세상 일이란 의도와 다른 결과가 언제나 나올 수 있는 법인데, 결과에 따라 큰 상처를 받는 청년에게 묻는다. 또한, 노인은 청년에게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는가를 묻는다. 인생에 주어진 시간은 짧지 않으며 청년에게는 무궁무진한 삶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데, 현재의 기화와 결핍에 예민한 마음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청년의 시간은 빨리 흐른다. 원하는 무엇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청년은 실망하고 좌절한다. 그리고 세상이 왜 이런 것이냐고 분노하기도 한다. 어떤 청년은 저성장 시대로 돌입한 현시대를 청년기에 겪지 않은 산업화 세대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생의 청년기에 겪는 시대는 기회와 결핍이라는 측면에서 한 번도 동일하지 않았다. 산업화 세대보다 앞선 세대는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보다 앞선 세대는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이 중에서 어떤 세대가 더 행복했던 것일까? 환경이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은 수긍할만한 하다. 그러나 몇 가지 지표로 좋은 시대를 구분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삶을 살아가는 환경과 상황은 늘 변해왔고, 그래도 좀 더 좋고 행복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열어가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청년에게 묻는다. 좀 더 길게 보고, 넓게 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그리고 청년의 본질인 열정이라는 화로에 냉정함 몇 방울을 떨어뜨려 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이루지 못한 중요한 일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유학을 가지 않은 일이다. 그 일을 생각하자면 회고로 말하기에는 가슴이 시리다. 그 일을 좀 더 젊었을 때, 견딜 수 있을 때 해야 했다.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렸고, 지금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후회라는 냉장고에 담아 둔 이런 일들을 이제는 흘려보냈다. 이런 삶의 경과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있었고 삶의 실제를 배웠다. 그래서 모든 경험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이 현재의 경험에서 다시 해석될 때 값진 인생의 지혜를 주기도 한다 내가 배워 온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살고 싶은 삶에서 이 배움은 어떤 지혜가 될까? 노인은 청년에게 이것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내 마음속에는 청년과 노인이 있고 서로가 말하고 대화한다. 나는 청년의 목소리도 듣고 노인의 목소리도 듣는다. 양쪽 말을 모두 들을 수 있는 마음속 공간을 가진 것은 시니어만의 특권이다. 청년과 노인의 대화는 결국 지금 무엇에 마음을 쓰는가? 써야 하는가? 바로 열정으로 모아진다.
열정은 인간의 개성이다. 다만 인생의 시기와 단계에 따라 열정의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 열정을 잃어버린 혹은 열정이 희미해진 시니어의 모습을 보고 시니어가 열정을 갖기란 힘들다는 생각에는 근거가 없다. 다만 열정을 발휘한 삶의 경험과 결과가 있기에, 청년보다는 시니어가 훨씬 신중해진 것이다. 그러나, 신중함은 때때로 너무 멀리 나가기도 한다. 마음속 청년은 노인에게 말한다.
열정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열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면서 필요한 감정이 아닐까? 당신은 왜 열정을 잃어버렸는가? 많은 경우 열정의 가치를 실용성이라는 잣대로 억누르는 마음의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이 이런 습관에 양분을 제공한다. '내가 굳이 이런 것을 왜 하고 싶을까?' 이것을 해서 어떤 이득이 있을까?' '이것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중간에 포기하면 시간만 낭비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속 청년의 말을 막아 버리는 것이 아닐까? 청년기에 당신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만 열정을 발휘했는가? 청년은 질문한다.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열정을 억누르는 마음이 열정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 아닐까? 당신은 마음의 습관을 서서히 만들어 온 것이다. 마치 오래 사용하지 않은 벽난로의 재가 다 말라간 것 같은 마음
그래서 열정을 찾는 열정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내 안의 청년이 나서야 한다. 실용성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 그 열정에 따르는 경험 자체가 내게 줄 수 있는 흥분과 변화의 쾌락을 상상해야 한다.
주세페 베르디는 80세에 오페라 <팔스타프>를 창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이전에 만들어보지 않은 희극적인 작품이었다. 과거 그가 만든 어느 작품과는 다른 놀라운 작품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베르디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경영사상가로 인정받는 피터 드러커는 평생 3~5년마다 주제를 바꿔 공부했다. 그는 공부한 결과를 39권의 책으로 저술했는데 이 중에 일본 미술과 소설도 있다. 드러커의 정신은 다양하고 새로운 열매가 거둬지는 풍요로운 대지였다.
나는 이렇게 마음속 두 주인공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 마음속 청년에게 발언권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노인에게는 여유를 허용하기로도. 열정은 그 자체로 존재를 새롭게 한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시니어로, 내 삶의 많은 과정에 발자취를 만든 것은 열정이었다. 그리고 변화는 오직 손과 발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할 때만 이루어지지 않는가? 마음속 상상은 현실에 작업실을 찾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물론 지금 나는 청년이 아니다. 그렇지만 노인도 아니다. 나에게 청년은 늘 있었으며 노인이 새로 입주했다. 시니어가 돼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청년과 노인이 사이좋게 살아간다. 물론, 내가 결코 바뀌지 않는 건물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