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로 살기(2)
세르반테스는 50이 넘은 나이에 근대문학을 출발시킨 명작으로 평가받는 <돈키호테>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것도 감옥에서!. 지구별에 사는 그 누구도 노화 혹은 퇴화라는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인간 정신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증거다. 인생은 결코 멈추지 않고 삶은 계속된다. 시니어로 막 진입한 사람으로서 나이 든 사람이 살아갈 충만한 삶을 생각한다.
왜 나는 나이듦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나이듦'이라는 말이 '젊음'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아니다. 나이듦은 젊음의 뒤에 따라오고, 젊음은 나이듦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단계에서 둘은 이어진다. 그렇지만 젊음이라는 정체성과는 다른 나이 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다른 것 같다. 나는 나이듦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누구나 앞을 향해 달려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시점이 있다. 나는 한 5년 전쯤 이 시점에 들어섰다. 나이듦을 처음으로 느꼈던 시점이었고 이후로 지나온 길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생각 안에는 제법 잘 살아온 것 같다는 뿌듯함이 있었지만 연민과 후회도 적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불편함이 꾸물대는 것도 강하게 느껴졌다.
불편함은 이루지 못한 꿈, 시도하지 못한 선택 탓인 듯싶다. 그런데 나는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다. 연민을 느껴도 그것을 오래 담아 두지는 않는다. 프로스트가 노래한 것처럼 그 누구도 지나온 길을 다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은 오직 길을 선택할 뿐 그 길에서 마주하는 경험을 바꿀 수는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젊은이는 중년의 경계를 지나고 있다. 지나온 길에 부족함과 아쉬움을 남기고 왔지만 아직 가지 않은 길이 남아 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갈 길에서 깊은 충만감을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를 먹은 어른의 정체성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듦을 생각하게 되었다. 삶에서 나이 듦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먼저 어떻게 해서 내가 나이 듦을 느끼고 발견하게 되었는가가 궁금하다. 자신을 나이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지점에는 삶을 바라보는 내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나이듦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신체적, 정신적 변화가 마치 전령처럼 나이 듦을 말해 준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빨라졌다. 좀 더 일찍 잠을 자기도 하지만 과거 팔팔했을 때 보다도 가벼운 몸으로 기상하는 나날이 많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일찍 일어나게 되는 현상에 대한 의학적 설명을 찾아보니 의외로 다양하다. 내 생각으로는 깨어 있는 동안에 고에너지 활동이 줄어드는 생활방식에 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낮아지는 활력에 대응해서 보다 일찍 그리고 자주 휴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체적 변화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보다는 정신적 변화가 더 큰 변화다. 언제부턴가 예전보다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자각을 하는데,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니 이것은 맞는 진단이다. 사람 이름을 잊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책에 나온 인명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독서할 때 중요하다 싶은 인물의 이름과 연표(출생 연도~사망 연도)를 외우는 버릇이 있는데, 요즈음 이 시도를 포기했다. 마음속으로 읽으면서 외웠다고 생각하지만 며칠 지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뇌의 노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런데, 이것 또한 참을만하다. 기억나지 않으면 다시 찾아보면 된다. 진정으로 가슴속에서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마음을 어지럽히는 놈이 따로 있다. 호기심의 상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호기심이 많다(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란 좁고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 욌다. 그래서 다양한 주제가 담긴 책을 읽어 왔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해 왔다. 사람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기질도 이런 행동을 거들기도 했다. 나의 사교 이력을 돌이켜 본다. 중학교 졸업시험을 마치자마자 동네 형의 권유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고, 고교시절에는 서클활동을 했으며, 대학 시절 내내 연극반, 종교 서클 활동을 바쁘게 했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토론모임과 시민단체 활동을 꾸준하게 했다. 넓고 깊게 사람과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바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몇 년 전부터는 모임도 줄였고 책을 다양하게 읽지도 않는다. 일을 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책들만 제한적으로 집어 든다. 흥미롭거나 새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줄어들었고 강렬한 호기심도 줄어들었다. 인생에 편식증이 있다면 바로 이 병에 걸린 것이다. 이 병의 출발점을 따져 보니 50이 넘으면서 시작된 것 같다.
호기심의 감소 혹은 상실은 불가피한 것일까?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인 나에게도 인간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여러 학자들이 인생을 구분한 내용을 보면 전체 인생을 3~5단계로 구분하는데 공통적으로 첫 단계는 '배움과 성장의 시기'로 동일하다. 인간은 매우 연약하게 태어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정신과 신체 양면에서 배우면서 성장하는 시기를 첫 번째로 거치는 존재다. 다음으로 배움과 성장의 시기를 마쳤다면 성숙기에 돌입하고, 성숙기는 필연적으로 쇠퇴기-신체와 정신-로 이어진다. 나이 듦의 단계는 성숙기 후반에서 쇠퇴기로 이어지는 시기다. 신체와 정신 모두 이 흐름을 따른다.
나는 시니어로 진입하면서 이런 인생법칙이 나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삶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빠뜨렸음을 자각했다.
나는 정신적 배움과 성장이 쇠퇴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성숙기 이후에 기억력 같은 정신능력이 쇠퇴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인식을 통한 성장이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베르디는 80세에 오페라 팔스타프를 창작했고, 경영사상가인 드러커는 92세까지 강의를 했지 않은가? 나 또한 삶이 멈추기보다는 충만하고 흥미로우며 의미 있기를 늘 기대했다. 그런데 불현듯 호기심을 상실해 가는 나의 모습은 나의 주장과는 모순이다. 호기심의 상실은 더 이상 배움과 성장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듦은 호기심을 잃어버림으로써 시작된다. 왜 나는 호기심을 잃어버린 것일까? "꿈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나이가 든다"라고 미국의 배우인 존 배리모어(John Barrymore)가 말했다고 하는데, 나를 지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꿈이란 미래에 그리는 것, 나는 꿈을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내가 소년과 청년시절에 알던 사람들이 나이 먹은 모습을 볼 때 나이듦을 느낀다. 2014년인가 30여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30여 명의 동창들을 다시 만났는데 내가 얼굴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10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머리털이 빠지고, 주름이 많은 친구일수록 청춘으로 빛나던 예전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비극적이지는 않다. 도토리 씨앗이 자라 상수리나무가 되고, 인간보다는 오래 살지만 나무 또한 죽는 것처럼 노화는 자연의 법칙이고, 나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비극은 정신적 성장을 포기한 사람을 만날 때다.
나는 정신적 성장의 포기를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 깊게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고정관념 혹은 고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더 이상 새롭고 올바른 것은 없고 찾을 필요도 없다는 강력한 신념이 바탕에 있는 상태가 포기다. 대개 50 대를 넘어 선 사람들 중에서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꼭 생물학적 나이가 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꼰대'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는 현상을 보면 말이다.
나는 '꼰대'같은 사람을 만날 때 나이 듦을 느낀다. 매우 강력하게 느낀다. 꼰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강요하는 사람을 말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들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전적으로 옳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 이런 믿음이 모두 근거가 없지는 않다. 현재의 믿음은 자신이 경험하고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꼰대도 한 때는 젊은 이었고, 변화를 시도했고 다양한 성공과 실패를 한 사람이다. 그가 가진 믿음은 그가 경험한 사실, 삶에 대한 나름의 성찰, 현명한 삶을 이끈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합쳐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각은 현실적이고 옳은 것이다. 즉, 꼰대가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그런데 왜 꼰대가 될까? 다른 사람은 다른 현실을 경험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경험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공감과 이입 불가다!
나는 자신의 세계, 자신의 생각, 자신의 경험에 머물러 타인이 보는 세계, 타인의 생각, 타인의 경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나이 듦을 발견한다. 정신적 성장의 멈춤, 새로움이 없고 호기심이 없는 정지된 마인드.
가끔씩 내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영어 공부를 시작했을 때였다. 만일 내가 영국이나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최소한 영어만큼은 공부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상은 매우 실존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왜 내가 굳이 이 나라에서 이런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살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은 그 어떤 인간도 삶의 시작을 선택할 수 없다는 실존적 조건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고 부른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 왜 던져진 것인가에는 이유도 없고 멋진 근거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만나는 세계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한다.
나는 20세기를 식민지로 시작하고, 끔찍한 대립과 전쟁을 거쳐 비로소 국가가 된 대한민국에서 1960년대에 태어나고 자랐다. 베이비붐 세대가 나의 직전 세대이고 밀레니얼 세대를 자녀로 둔 세대에 속한다.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평범하게 성장했고,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를 거쳐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일해 왔다. 청년기를 지나 가정을 꾸렸고 가장으로서 삶의 영역을 꾸려 왔다.
그런데,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었다. 요즘 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책임이랄까 혹은 기여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정치인이 져야 하는 책임보다 나의 책임은 적은 것일까? 혹은 다른 것일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앞에서 나는 어떤 종류의 책임을 어떤 범위까지 느껴야 할까?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잊고 있었다. 먹고살기 바빴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책임보다 권리를 생각했고 책임을 생각할 때도 이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책임에 관한 한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이 시민보다는 더 많은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양도한, 혹은 책임을 씌운 정치인들에게 신뢰를 갖고 있지 않은 현재, 과거의 내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정치인이나 지도층을 불신하면서 이들에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참여하고 간섭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정과 영향에 대해 내가 따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내가 살아가는 사회는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 내 자녀들도 살고 있으며 수십 년이 지나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회로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회가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갈 사람들에게도 좋은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는 사회 속에 있을 뿐 사회를 위해 어떠한 기여도 하고 있지 않다. 기업 경영자로서 내가 제공하는 상품을 통해 기여하고 있지만 시민으로서의 기여는 하고 있지 않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거나 수술을 받는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는 감기 같은 것도 있지만 수술을 필요로 하는 중대한 문제도 있다. 누가 이 문제를 치료하는가? 치료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는가? 걱정은 하지만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나를 보며 나는 나이듦을 느낀다. 내가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원하는 삶과 미래가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의지는 작다. 미래는 변화에 대한 용감한 행동을 요구하지만 나는 안정을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이듦을 느낀다. 세상에 관여하는 범위가 줄어들고 관계가 축소되는 삶에서 나는 나이 듦을 느낀다.
나이듦은 전 인생에 걸쳐 인간 삶을 구분하지만 시기마다 그 느낌은 다르다. 나는 소년기, 청년기에도 내 나이를 느꼈지만 흥분감과 기대감이 충만한 가운데 미래를 가깝게 느끼면서 나이를 자각했다. 10대, 20대는 무엇인가를 앞에 두고 달려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시니어로서 나이듦은 다르게 다가온다. 상실감과 공허감이 느껴지고, 미래는 멀게 느껴지고 과거는 가깝게 있다. 나는 이렇게 느끼면서 나이듦을 자각한다. 그래서 나이듦이 인생에 주는 의미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삶은 늘 계속되고, 그 속에서 기쁨과 행복, 즐거움과 쾌적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청년기에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고민 없이도 삶은 계속되고 미래는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니어로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를 이제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공허감과 상실감은 과거 살아온 인생과 연관이 있다. 인생을 통해 경험하고 배웠기 때문이고, 그것이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시니어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삶이 밀려간다고 할까? 지나온 과거의 기억과 업적이 앞날을 결정하고, 나는 그 안에서 아름다운 마무리, 그러나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마무리라는 확신이 없는 마무리로 마감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삶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시니어는 인생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는 유일한 인생의 단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