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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ul 07. 2019

<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메시지를 일부 참고하여

<2000년 4월 29일 작성, 2019년 7월 7일 퇴고>


종교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종의 종교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와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무한의 가치, 궁극적인 무엇, 절대적인 곳을 향해 치달아 가려한다는 의미에 좀 더 가깝다. 인간의 일생이 그나마 이른바 "가치"라는 것을 지니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구도하는 자세로 어떤 것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닿을 수 없는 완전성, 완벽성에 대한 지향이 되는 순간 종교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혹자는 "생존" 그 자체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얘기하면서, 또는 맹목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로 대중이 살아가고 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물화시키는 형식으로 이야기하면서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을 그만두고 눈을 감아버린 채, 말하기마저 멈추어, 들리는 것조차 거부한 채로 살아가는 "아큐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인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부분을 최소화하고 단순화하면, 언제든 틀릴 이유가 없다. 그만의 완벽한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자세는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적인 도그마에 가깝다. 이미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자신은 그것을 안다고 선언해버리는 것이다. 그곳에는 명확함이 있고, 단순함과 간결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멈춰버린 것이다. 단지 완전과 완벽이라고 선언해버린 것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비록 그 내부에 대단한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타인을 끝없이 물화시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로까지 파급된다. 타인을 무시하기를 일삼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자기 인생이 타인을 무시하여 찾게 되는 가치 이외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게 생존하는 데 있어서 가히 나쁘지는 않은 자세이기는 하다. 우린 주변에 그런 삶의 자세를 지니고 강자로서 살아가며, 그런 부류의 사람과 함께 모여 철옹성을 구축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옳고 그름. 더 나은 생각의 선택은 이미 사라져 있다. 목적을 수단화하고 수단을 목적화하는 삶이 반복되기 일수다.


삶이 합리적으로 한정된 확실한 조건, 이를테면 돈, 지위, 인기, 권력이라는 차원에 집착하는 것으로 충분한 형태가 되어버리면( 물론 이 형태를 난 거부하지 않는다. 나도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 그 인생은 무척 빠른 시간 안에 '죽음'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취'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잡고, 사랑을 여기저기에서 받게 되더라도 *다*르*지* *않*다* 당신이 어릴 때 느꼈던 만족감 이상을 주지 못한다. 그 만족감의 반복이 이뤄지고 삶은 고양되거나 확장되지 않는다.


분명히 보다 높은 가치, 인간 그 자체의 향상, 어쩌면 "이상"이라고 불리는 것을 향해 나아갈 때, 끊임없는 상승이 인생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9년 현재, 우리의 삶은 이런 존재하는 삶으로부터 먼 거리에 와 있고, 소유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향은 점점 더 극단화되고 만연화되어 예외를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소수가 되더라도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겐 타인과 비교할 필요도 없는 세계가 그 순간부터 그의 것이 된다. 끊임없이 자기가 바라는 곳을 향해서 상승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의 우주에는 지붕이 없고, 마음에는 벽이 없으며, 생각에는 울타리가 없다.



항시 우리를 둘러싸버리는 아/타의 구분, 맹렬한 자의식의 구성, 그리고 끊임없이 타인을 물화하는 자동시스템을 가동해야 살아가는 이유가 생기는 끊임없는 "무시"작용은 결국 한 가지의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타인과 나의 이른 죽음(Sudden Death), 삶의 가치 상실로 나아간다.


누군가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왜 타인을 무시할 뿐인데 나까지 죽음(사물화 또는 자동화되는 것을 비유하는 언어이다.)에 이르게 되는 거냐고.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충분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타인을 무시할 때, 물화되는 것은 단지 그 사람 하나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까지 무시되는 대상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때론 일부이고, 때론 전부를 포함하고도 남는다.


"무시"작용이 반복될 때마다 자기 자신의 우월감이 상승하는 반면에 자기 존재 자체는 망가져 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당신은 아는지... 모두가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이니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죽음은 순식간에 다가온다.


나는 도교의 이 문구와 기독교의 다음 문구를 정말로 좋아한다.

"천하보다 자기 자신의 몸을 아끼는 자에게는 천하를 맡겨도 좋을 것이다."(노자도덕경)

"무릇 자기를 높이려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니"(성경)


1. 자기의 몸을 아끼는 자는 천하에 속한 인간들의 몸을 아끼는 법도 가장 잘 아는 자이며,


2. 타인의 동등한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자의식을 그 "가능성"상으로 낮출 줄 아는 자는 결국에는 가능성을 실현하여 높아지나, 반대로 애초부터 타인의 가능성을 무시하여 자기의 명예나 자존심의 상승만을 꾀하는 자는 결국 자기의 "가능성"조차 실현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종내는 가장 낮은 자의 무리에 처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들려오기 때문이다.



겸손함은 타인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서 다가오는 미덕이며, 타인의 가치를 마음속으로 열심히 깎아내리는데 몰두하는 자는 아무리 말로 겸손함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미 겸손이라는 덕목을 벗어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에게 경계를 품고 사는 게 아닐지...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하루키의 소설에서 이러한 문구를 발견함과 동시에 무척 기뻤다는 말도 남겨두고 싶다. "원래부터 강한 자는 없어, 모두 비슷한데, 어떤 사람이 먼저 강해지겠다고 나서느냐 이게 차이를 만드는 거야..."(1974년의 핀볼)


가능성을 동등하게 품은 선상에서 진정 삶다운 삶을 살면서 동시에 강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종교적 상승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던가. 종교적 삶이라는 것은, 어떤 종교집단에 귀의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으며, 종교 밖에서도 추구할 수 있는 삶이다.


2019년 현재, 이런 삶을 살아가거나 목격하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나조차도 20년간 존재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보다는 조금씩 나아졌고 달라졌다. 나와 타인의 성장 가능성을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 비록 아주 조금씩이라고 해도. 그 때문에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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