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인이라 자각하는 사람만이 생활인이다.
생활인
위대한 노자는 삶의 형태를
여기에 고정하고 평생을 지냈다고 한다.
하급의 세금관리에 불과한 인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인류를 뒤흔드는 완성도 높은
철학을 후세에 남겼다.
어쩌면 모든 사상의 원점은
자기 생활에 대한 철두철미한 관조와
사색에 그 핵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학자나 고급 지식의
가치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회사랑 집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왕복하면서, 특별히 읽는 책이나
특별한 문화/정보 흡수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끈질기게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생활인으로서의 정의를 찾고 있다.
생활인이라 자각하는 사람만이
생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활인이 어떻게 보이는가는
보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각자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생활인'을
그 단어를 통해서 감잡을 뿐이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당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해석은
그 사람의 수준에 달려 있다.
--홍차중독(노스모크의 일원)"
이를테면, 비천하고 상스러운 사람이나
고매하고 품격 있고 고상한 사람을
정당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판단력과 통찰력의 수준,
그리고 삶에 대한 경험과 배운 학문들을
통해서 나름대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들은 전부가 동일하지는 않다.
나는 생활인이라는 단어를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본다.
나를 생활인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옳고 보기 좋고 폼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나 이를테면 겸손의 의미로
한 것도 아니라 그것이 나 자신의
현재 모습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학식이나 기술이 있건 없건,
두뇌가 좋던 나쁘던 이 영역에
위치할 수 있고, 돈이 많건 적건,
잘생기던 못생기던, 대부분의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던,
사람들로부터 장점을 주로 찾아내는
기질이 있던,
결국에는 그 영역에 자신이 있다고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치평가가 개입된 단어라기 보다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분류하는 단어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변화 가능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의 생활인이 내일의 생활인으로
똑같이 이어지진 않는다
적어도,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이나마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오늘의 생활인이라고 부르는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10초 정도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우린 다른 종류의 생활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간다.
사람들이 속해있는 각각의
삶의 양태들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과 사유는 대단한 차이를
지닌다.
통치철학으로 불릴 수도 있는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은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으로부터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확연히
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구절이 된다.
이른바 위대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대로 우리 앞의
정치라는 것은 실제 그렇게 이뤄지고 있다.
이와 같은 말은 현대의 생활인으로서
'인간'을 보았을 때에는
나올 수가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노자는 생활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문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해있는 상대적인 시공에서
사람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달리 가지게 된다.
현재,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인간이란 게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하면서,
이를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이야기의 요약이다.
자신을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권력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현대의 생활인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수 없다.
현재 이곳, 이 시간, 우리 그 자체,
우리의 생활이라는 대상에 보다
더한 집중을 하면서,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을
일컫고 있다.
우리가 가진 정보의 질과 양은 다르다.
질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꼭 수직적인
체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몽상가는 현실을 꿈꾼다."라는
에리히 프롬의 말과도 같이
우리가 닿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미래에 매료되어버릴 뿐이라던가,
우리를 휘어잡고 있는 커다란 무게의
과거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생활인이라 더더욱 정확하게 불릴 만하다.
생활 속에 매몰되어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생활을 만들어가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브런치의 글들은 텍스트가 융성했던
시대가 아침이고, 텍스트가 저무는
시대가 점심인양. 그사이에 놓여있는
다리와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이른바 뛰어난 글을 써봤던 적은 없다.
그리고 그러기에는 한참 모자란 내공을
그리고 노력의 부족을 느낀다.
다만, 역사적 사료의 가치로서는
뛰어난 문장가의 글보다는 이렇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건져낸 글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을 보면
뛰어난 문장가들의 글보다
중상주의하에서 나름 교양을
습득하면서 상업 행위를 해온
사람의 일기가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더 많은 힌트를 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후대에 남길 글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백여 년이 지나고 나서 우리나라의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다시 이어진다면, 일상을 추적하는데
있어 이 글들은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의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다.
도대체 일과 생활 외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녀석의 피드백을 받아보고 싶다.
이것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유감스럽게도 이후 세대인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잘 해오지 못했던 일인 것 같다.
이른바 꼰대로서 길게 설교할 수 없는
이 시대에 이르러 점점 더 세대 간의
장벽은 높아지고 있는 게 아닐지.
앞으로도 점점 더 이러한 세대 간의
생각의 차이는 더 커져갈 것이다.
영화 한편을 보아도 가져오는 느낌이
많이 다를 수 있듯이, 하나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산산이 쪼개진 관점들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 소통하는 방식은 영상과
디지털로 함축된 정보가 되어간다.
브런치의 글들은 텍스트가 융성했던
시대가 아침이고, 텍스트가 저무는
시대가 점심인양. 그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와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