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의 주인과 단골 구청 직원, 아르바이트 생이 들었던 노래에 대해서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21살, 1994년도의 어느 여름방학 때 나는 한 달 동안만 문을 열다가 닫기로 예정된 술집 "라파엘로"에서 가게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아르바이트 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아르바이트 광고 중에도 그런 광고에 혹해서 찾아갔던 것이었다.
생활 정보지에서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건 순간 주인아주머니가 이야기한 것은 "판단력이 좋을 필요가 있어요"였다. '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판단력이 좋을 필요는 또 무엇일까?'하는 순진한 궁금함도 생겼었다.
다르게는 가게를 닫는 중에 온전히 맡아 경영하는 것은 무역학과 학생이었지만 이른바 전공 필수로 배웠던 경영학이라는 것을 작게 실행해볼 기회가 될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당시에 처했던 환경이 숙식도 제공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에 그곳을 선택했던 피치 못할 이유도 있었다.
다르게 보자면 한창 좋아했던 작가 하루키 소설에서 툭하면 나왔던 재즈바 제이스의 풍경이 머리에 어른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손님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주인은 30대 후반의 여자분이었는데, 그 당시로부터도 15여 년 전에 티브이 등에서 활동했던 ~시스터즈 같은 여성 코러스 그룹의 일원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도 60대 가까이 되어 그 당시의 화장이나 옷차림은 하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짧은 단발에 짙은 화장을 한 채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치렁치렁 달린 옷을 주로 입고 있었다. 가게를 팔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던 낮에는 평범한 아주머니의 외양을 하고 있었지만 가게의 영업이 시작되는 오후 4시부터는 그런 외양으로 다시 돌아갔었다.
때때로 주중에 한번 이상 이 분을 뵈러 찾아오는 단골 아저씨가 있었다. 구청 공무원이라 하였는데 항상 비싼 양주 세트를 하나 정도는 주문해서 이 주인아주머니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고는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채로 발걸음을 돌리고는 했었다. 취향이 일정한 순정남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시스터즈의 광팬이었던 젊은 과거가 있었는지, 그런 것은 알 도리가 없었다. 전형적인 그 시대의 50대를 대변하는 스타일의 손님이었고, 기억할만한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말발"이 기가 막히게 좋았고, 다양한 화제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 남아 있다.
이 분 말고는 이른바 제대로 매상을 올려주는 손님은 없었다. 때로는 이른바 조폭 같은 손님이 와서 진상을 떨기라도 하면 잘 달래서 내보내고, 가게에서 일하던 여직원들이 하나둘씩 연락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주인과 이야기를 길게 나눌 필요도 없이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말끔하게 퇴직 처리를 하는 일도 했다. 들어온 손님들이 술따를 여종업원이 있는가 물을 때마다, 닫을 가게라서 없다고 말하면서 내보내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조금씩 이 바닥의 생리를 알게 되었다.
그곳은 주인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 손님들 모두가 그냥 알코올에 취한 듯 들렸다가 그렇게 아무것도 서로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 채로 떠나는 곳이었다. 카펜터스의 "This Masquerade(가장무도회)"를 아무도 없는 홀에서 자기 전까지 홀로 듣고, 수십 번씩 따라 부르는 과정에서 이 노래가 가진 느낌이 번역 없이도 그 느낌 그대로 내속으로 몰려드는 것도 느꼈다. 마침,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가면 놀이 같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하루키가 재즈카페를 열고서 오랜 시간 일을 하면서 겪었을 여러 가지 느낌들 중에 일부분을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니 시간이 그냥 허송세월로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저 멀리에 있는 그분의 경험을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모사해서 하고 있는 중이구나. 이 정도가 일을 하면서 얻는 보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단골 구청 직원 아저씨는 바에 자리를 하고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하루가 이렇게 저문다고 생각했을 때, 하얀 한복 도포를 입은 하얀 머리에 하얀 콧수염과 턱수염을 수북이 기른 근성이 있어 보이는 눈을 가진 노인이 가게문을 고집스럽게 열면서 밀고 들어왔다. 적선을 받으려고 온 것이 분명하겠지만, 매정하게 한마디로 내보낼 수 없는 내공이 있었다.
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중에, 구청 직원 아저씨는 갑자기 뭔가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양, 이 도인 같은 생김새의 걸인을 데려오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양주 한잔을 따라 권하면서 바의 옆자리에 앉혔다. 선의라고 봐야 할지, 심심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인도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흥미로운 눈으로 걸인을 훑어보면서 바의 안에서 양주를 한병 더 꺼내왔다. 그리고는 걸인과 구청 직원 간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나 또한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관찰을 했다.
그러다 알았다. 이 구청 직원 아저씨는 자신이 이 걸인에 비해서 얼마나 자본주의적으로 성공했는지를 주인 앞에서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막 사셨길래, 이 나이 되고서 걸인 생활을 하시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비굴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 사람인 듯했으나, 오래간만에 술을 한잔 얻어먹은 탓인지 걸인은 화를 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그저 걸인이 술이나마 적선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전에 성악을 했었다는 전적을 말하더니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주인이 부르기 시작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처량"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어서 걸인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평온한 일상의 술집은 마치 뮤지컬 무대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만 3번 정도 반복해서 불러대면서 잡담이 오갔다. 걸인은 슬슬 올라오는 취기와 더불어 조금씩 노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굴욕을 넘긴 걸인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자, 구청 직원은 역사에 대해서 걸인과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견물이지요"라는 이야기로 핏대를 올리면서 "아니요. 역사는 흐름이고 생명체요"라고 외치는 걸인과 견물이냐 생명체냐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으면 내 말대로 맞다고 해'라고 강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이를 보고 있다 보니, 걸인을 끌어내서 뒤로 보내야 할지 아니면 이 이상한 주인과 구청 직원에게 욕을 해야 할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이런 게 판단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이 걸인이 "울 밑에 선 봉숭아"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울 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 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러운 봄바람에 환생 키를 바라노라"
'모습'이 아니라 '모양'이었고, '봉선화'가 아니라 '봉숭아'였다. 이 노래의 가사는 걸인을 무시하고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침탈당한 국권을 잃은 일제 강점기의 조국을 연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노래는 이제는 이 걸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로 한번 더 변한 것이고, 다른 의미로는 주인과 구청 직원의 무지함과 심술궂음을 비웃는 노래가 되었다.
노래를 마치자마자 내보낼 새도 없이 이 걸인은 문 근처에 있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래도 나를 인간답게 대해준 것은 이곳에서 당신이 유일했소. 내 잊지 않고 언젠가는 갚으리다."라고 또렷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분이 문을 열고 떠난 뒤 술집 안에는 정적이 가득했다. 갚은 것은 이렇게 22년 뒤에 이곳에 써질 이야기를 하나 남겨준 것일 테였다.
구청 직원은 나를 쳐다보고, "저 노인은 젊었을 때 최소한 고등학교 이상은 나온 학식이 있는 사람이야, 그때 고등학교는 지금의 고등학교와는 완전히 달랐지. 훨씬 수준이 높았어...... 그냥 동냥을 하러 다닐 사람은 아닌데, 이렇게 살고 있구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뭔가를 분명히 후회하는 듯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주인은 양주를 은근슬쩍 한 병 더 따게 된 것이 매우 기분 좋았는지, 노래를 한 곳 살려서 불러봤던 게 좋았는지 내내 웃고 있었다.
이후에 아르바이트 기간이 끝나고 마지막 날 월급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주인에게 의례적인 인사만을 남긴 채 자리를 일어섰다. 더불어 그 구청 직원이 그나마 반성이란 것을 조금은 했었는지도 떠올려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두 사람 같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게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답답함은 그저 익숙함으로 변해버렸고 그것은 그대로 삶에 녹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로 남아버렸다.
그때 이후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 서 돈을 어떻게 더 잘 벌고, 어떻게 회사에서 인정받고 공헌을 해서 잘 살아남아 내 가정을 잘 가꾸어갈 것인가에 더 집중해 왔다. 최소한 어디에서건 그 걸인처럼 대우를 받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걸인으로 보이건 신분이 미천해 보이건 실례를 하지 않는다면 먼저 그런 사람들을 최대한 예의를 가지고 대하려 노력했다.
술집에서 설사 멀쩡한 걸인이 문 앞에서 배척은 당하더라도 바에 초대받고서 망신은 당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으면 한다는 소망이 그럼에도 저 어딘가에 잠재의식처럼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오늘에야 선명한 의식으로 이 일화가 다시 떠올라온 것을 보자면.
돈과 권력이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신보다 약한 자를 무시하고 괴롭히면서 그 이상의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그런 사회가 벌써 수십 년째, 위로부터 아래까지 그대로라는 것이 정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20대의 정신을 아직도 그대로 갖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세대에 속해 있더라도 양심을 가지고 인식해야 할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사회가 제대로 달라질 그런 기회가 온 것 같다. 최소한 96%를 대변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조금은 더 '정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일제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2016.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