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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an 22. 2024

버드맨, 찔러 보기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유명인과 배우, 경계를 날아다니다

(사진 출처: MUBI)


2014년에 개봉한 이 작품은 그 해 이후부터 계속해서 내게 "봐야 한다, 봐야 한다"라는 주문을 최면처럼 걸어왔다. 보지 않으려고 애써 저항해 온지가 어언 10년. 이제야 봤다.


이 작품이 명작이란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몇 편의 "버드맨"을 극찬하는 평론과 리뷰도 봤었다. 기억은 전혀 안 나지만.


"마이클 키튼"이 "배트맨 1편(1989)"과 "배트맨 2편(1992)"의 주연인 "배트맨"이었을 때, 이 시리즈의 1편에 OST를 맡은 이는 팝의 황태자 "프린스"였다.

(출처: Plierates)

그의 펑키함과 자유분방한 스타일은 또한 독창적이고도 회화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팀 버튼 감독"의 스타일과 폭발적인 조화를 이뤘다.


그 작품 속에서 당시의 관객을 흥분으로 몰아갔던 색다르고도 최첨단에 가까웠던 그래픽은 지금은 촌스럽기 그지없지만, 고유성이 번득이듯이 보였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화려한 시절 잘 나갔던 배우가 퇴물이 되었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브로드웨이"에 연극을 감독이자 주연배우로서 올리면서 재기하는 우여곡절의 드라마다.


그런데, 이것이 단선적인 스토리로 흘러가는 작품이 되지 않았고, 지금 봐도 파격적인 영화적 구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극찬을 받는 것이다.


감독인 "곤잘레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의 작품 중에 지금까지도 가슴에 느껴지는 아릿함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아모레스 페로스(2000)"다.

(출처: Bloody Brilliant Review)

이 작품을 봤던 기억을 되살리자면, 다른 작품인 "바벨(2006)"과 "21그램(2003)"도 찾아봐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가 작품 속 인물의 내외면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는지 알기에 모두 꺼리고 있었다.

(출처 : The Onion(좌), Medium(우))

그런데 24년이 지나서 보게 된 그의 2014년 작품 “버드맨”이 보여주는 잔인함은 그렇게 꺼림칙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만큼 영화 속 인물을 절망과 배신, 고통 속에 빠뜨린 다른 작품을 많이 봤기 때문일 거다.


끝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봤다. "이냐리투 감독"의 다른 작품도 찾아보게 될 것이다.


1. 재미있게 보기 위해 배제해야 할 선입견:

 1) 예술 영화라서 지루할 것이다(X)

 2) "배트맨"처럼 유치할 것이다(X)

 3) "마이클 키튼"말고는 볼만한 배우가 없다(X)

2. 버드맨, 찔러 보기

3. 마지막 장면에서 "리건"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재미없게 만들어진
천편일률적이고 어설픈
히어로물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1. 재미있게 보기 위해 배제해야 할 선입견:

1) 예술 영화라서 지루할 것이다(X)

포스터만 봐서는 얼핏 풍부한 교양으로 무장하고 작품의 사회학적이고도 철학적이고 영화사적인 맥락과 문맥을 파악하고 봐야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출처 : iMDb)

그렇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동네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글을 쓰는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영화 전문가"일 것이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런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영화 밖에서건 영화 속에서건 할리우드 히어로물에서 성공했던 실제 배우가 오랜 무명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온다.


실제 배우인 "마이클 키튼"과 인터뷰를 하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것이 그 배우의 삶과 생각,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처한 상황이 같은 영화 속 배역 "리건 톰슨"에게 자신을 이입해서 실제의 자신에 가까운 연기를 해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마이클"의 연기는 사실적이고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화로써, 환상과 시공, 실제 공간을 앞 뒤 양옆으로 뒤틀어 움직이고 교차하는 신을 연결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몇 군데 안 되는 세트에서 배우가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이지만, 내내 드럼 연주 소리가 변박을 거듭하면서 거의 그치질 않고 들리면서 긴장감과 리듬감을 계속 느끼게 만든다. 재즈의 잼처럼.


그것이 OST 연주가 아니라 실제로 길에서나, 화면 속 실내 공간 어딘가에서 갑자기 드럼과 더불어 연주자가 등장하여 현장에서 들려주는 연주임을 보여준다.


이 같은 의의성으로 점철된 새로운 장면은 예측이 가능하리라 느껴지는 영화 속 상황을 자꾸 의의의 것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재미없게 만들어진 천편일률적이고 어설픈 히어로물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2) "배트맨"처럼 유치할 것이다(X)

70대의 "마이클 키튼"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소니 픽처스의 스파이더맨 작품에서 "벌처"라는 빌런으로 다시 블록버스터로 돌아왔다.


실패한 작품이긴 하지만 디씨 유니버스의 "더 플래시"에서 다시 다른 시공의 "배트맨" 역할을 맡아서 "버드맨"에서 예견된 것처럼 다시 "블록버스터"의 주연 비중의 역할도 했다. 놀랍게도.


하지만 위의 모두가 2020년대에 벌어진 일이다. 2014년의 "버드맨"에서 "마이클 키튼"은 실제 "배트맨"에서 온 "히어로물 주인공의 이미지"를 그렇게 많이 드러내지 않는다.

(출처 : The Guardian)

이 작품 속의 대사로 "다른 문화를 말살하듯이 등장하는 히어로물 영화"를 언급한다. 실제로 2014년 경의 상황은 그러했다. "히어로물 블록버스터"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60대에 이른 노년의 배우로서 숱이 없는 머리에 초라해진 몸 상태를 드러내면서 "인기인"에서 추락하여 망가진 한 남자의 고뇌와 코너에 몰린 심리상태를 극단까지 보여준다.


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환상이 현실로 변하는 것 같은 몇 장면이 "배트맨"과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내긴 하지만 "배트맨"의 저음 톤인 자신의 내부의 또 다른 인격 "목소리" 외엔 히어로물은 양념 격이다.


3) "마이클 키튼"말고는 볼만한 배우가 없다(X)

물론 스폿 라이트를 모두 가져가는 그의 인생을 담은 연기의 존재감은 공연한 다른 배우의 존재감을 일거에 심심하게 만들어버릴 정도이긴 하다.


하지만 "마이클"과 군데군데서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면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흥미로움을 지속시키는데 다른 막강한 유명세와 더불은 연기력을 갖춘 배우의 역할의 비중도 작지 않다.


"킹콩" 등으로 블록버스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도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력을 쌓아온 강력한 내공을 지닌 "레슬리"역의 "나오미 와츠",


연극 무대에서만 자기 자신이 되는 "마이크 샤이너"역의 "에드워드 노튼", "마약" 중독 같은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아버지를 지지하는 "샘 톰슨"역의 "엠마 스톤",


전처로서 미련을 주고받는 "실비아 톰슨"역의 "에이미 라이언"도 극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리건"과의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각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자면 나름 호화로운 캐스팅이다.

(출처 : Vulture)

창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가
질투에 빠져 쓰는 글을
평론이라고 한다


2. 버드맨, 찔러보기

예술 영화 쪽에 치우치지 않은 상업적인 대중 영화이면서도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클리셰를 최소화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수많은 반전을 낳는 극화였다.


이 정도면 잘 만든 정도를 넘어서서 극찬을 해주어야만 할 정도의 작품이다. 코미디의 요소가 계속 반복되고 있지만 그것이 진지하지 않은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는다.


주인공은 과거 20년 전에 자신이 출연했던 히어로물 영화 "버드맨"에서의 유명세를 기반으로 계속 추락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노년에 이르러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여 "브로드웨이"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인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하는 말들"이란 단편을 기반으로 만든 연극을 공연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무력감에 끌려갈만한 타이밍에 자신만이 있는 공간에서 자신 내부의 낮은 톤을 지닌 "버드맨" 역할을 할 때의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리건"이 초라한 자신의 현실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자신을 도발하거나 용기를 불어넣고, 폭력성을 발휘하거나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하도록 만든다.


자기 자신을 여러 개로 나눠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각기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을 다룬 작품은 꽤 많이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작품 중에서도 더 독특한 방법으로 이를 사용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목소리는 그의 내면에서만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있는 물건 등을 움직이거나 파괴할 때,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연기를 하는 배우를 조명기기를 떨어뜨려 다치게 만들 때도 쓰인다.


그러면서도 모호하게 그저 그의 주변에서 환상으로 나타나 하늘을 날게 만들고서는 자신이 가야 할 곳에 도착한 뒤에는 곧 뒤따라온 택시 운전사가 요금을 받아가는 식으로 "비현실적인 능력"처럼 보이게도 한다.


지질하고 비열한 악당 연기도 마다하지 않는, "이중인격" 등을 포함한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 "에드워드 노튼"과의 갈등 과정에서 "마이클 키튼"의 연기력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뚜렷한 내공이 보였다.  

(출처 : Reddit)

"엠마 스톤"을 그저 "라라 랜드"에서만 봤을 관객은 차근차근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놀랍고도 매력적인 그의 연기력을 목격할 때마다 잔잔한 신선함을 느끼게 되는 법인데 여기에서도 그랬다.


언뜻 안 어울릴 것 같은 문제아 역할에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자신처럼 일부러 위악을 행하는 "마이크 샤이너"를 알아차리고 그를 유혹하고 사랑하는 장면 등을 자연스럽게 연기해 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나의 연극을 올리면서 전재산을 걸어 우여곡절 끝에 첫 공연을 하려고 하는 순간 "마이크 샤이너"와 함께 갔던 바에서 만난 유명 여류 평론가인 "태비사 디킨스"와 "리건"이 나누는 대화가 극의 가장 강렬한 마무리를 위한 끝판왕 대결처럼 그려진다.


"바빌론(2023)"에서 퇴물이 된 무성 영화 시대의 거물 배우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는 여류 유명 평론가와 대화를 하는 중에 '잘 나갈 때야 너를 띄워줄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지만,


이제 퇴물이 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너를 더 이상 잘 써줄 이유가 없고, 자기와 같이 엄청난 개미떼와도 같은 영화판의 수많은 존재가 힘을 잃은 거물을 뜯어 삼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같은 대화가 오갔기 때문에 이를 떠올려서 보자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이크"가 찾아가서 이야기를 할 때는 제대로 된 평가를 담은 글을 "타임스"의 평가 기사로 올리기도 했던 그는 "리건"이 찾아가 자신이 배우가 된 이유인


유명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가 자신의 연기를 보고 진심으로 연기를 해준 것에 감사했다는 냅킨에 적은 글귀를 보여주며 "마이크"가 들어서 자기의 이야기인 것처럼 속인 내용을 정정해보려 했지만


바로 그전 날에 "프리뷰 마지막 공연"을 하다가 잘못 공연장 밖으로 나가 비 오는 동네를 팬티 차림으로 뛰어 돌면서 수많은 이로부터 SNS에 높은 조회수를 올리게 된 그에게 성질이 난 것인지


"태비사"는 "첫 공연에 대해서 나는 최악의 평을 내릴 것이고, 그다음 날 너는 공연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란 이야기를 단호하게 한다.


여기에 대해서 "리건"은 '창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가 질투에 빠져 쓰는 글을 평론이라고 한다'라고 하며 논쟁을 하려 하고, 그의 술잔을 집어 벽에 던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태비사"는 움츠리지 않고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하는 이는 배우(Actor)이고, 할리우드 히어로물에 나와서 인기를 끄는 이는 유명인(Celebrity)'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유명인 따위가 잘되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우리나라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도 "평론가"와 이른바 창작을 진행하는 진영의 "작가", "감독", "배우" 등등은 사이좋게 얼굴을 바라보기보다는 서로 경계심을 갖고 쳐다보는 시선으로 대하고 있으리란 추정이 된다.


이 파국 앞에서 "리건"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려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다른 자아인 "버드맨"으로부터 망했다고 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유명해질 수 있는 "히어로물을 또 찍으면 되지"하는 격려도 받다가 "하늘을 진짜로 날아서" 자신이 가야만 하는 곳이다라고 한 자신의 작품을 상연할 극장에 내려온다.


수많은 영상물 속의 "다잉 메시지" 클리셰처럼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죽게 될 것이다"라는 복선과 힌트를 영화 곳곳에 깔아 두고,


가짜 총 대신 진짜 탄환이 든 총을 지닌 채로 극의 마지막 장을 연기하기 위해 무대로 오른다. 관객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을 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관객이나 시청자는 다양한 관점에 호응하는 영화의 다중플롯에 감탄하게 된다. 창작자의 관점에서 창작의 고통을,


인생의 재기를 꿈꾸는 이에게는 난관을 극복하는 용기를, 공연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창작과정의 장애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영화 관련자에겐 보다 다양한 문화를 포용한 창작을, 평론가에겐 열린 사고의 확장을, 가족의 소중함을, 히어로물과 더불어 이뤄지는 성장의 단계를, 보여준다.


단선적이지 않고 교차하고 반복하면서도 다르게 변주하고, 섬세하고도 끝없이 반전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만든다. 이런 작품을 제대로 즐겁게 볼 수 있다면 시간이 아깝지 않다.



현실 속의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변화와 성장,
성숙을 위한 기재를
내외부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당위를 제공하고 있다


3. 마지막 장면에서 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포일러라는 것은 문학이 되었든 그 어떤 콘텐츠가 되었던 그 누구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완벽하게 순수하고 티 하나 없이 순결한 스토리가 있다는 가정에서 생긴 용어라고 한다.


하지만 티 하나 없이 완벽하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전혀 상상해 본 적이 없거나 접해본 적이 없는 완전무결하게 있는 "순결한 스토리"라는 전설이나 환상은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다.


작품의 결론은 우리의 마음에 희망의 열린 결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환상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말지라도. 그것이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일 것이다.


다만, 이 작품 속에서 "리건"은 "히어로물"의 "인기 배우" 시절에 대한 자신의 미련과 후회, 절망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자아인 "버드맨"을 수단으로 해서 퇴행하지 않고 극복하며 성숙하게 된다.


나이가 아무리 60이나 70이 되어가도 과거의 자신에 사로잡히기보단 현실 속의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변화와 성장, 성숙을 위한 기재를 내외부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당위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이 또 다른 강력한 자아를 내부에 갖거나 연극 공연을 브로드웨이 같은 곳에서 거창하게 열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작품을 봤다면 아마도 당신은 나처럼 당장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거나 튀어나온 배를 넣기 위해 계단이나 길을 걷거나 용기를 주는 영화를 찾아보면서 자신의 기운을 북돋거나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도움을 줄 책이나 정보를 읽게 될 것이다.


가라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이미지가 나이가 들어 추락하고 있다는 것에 그냥 침잠하지 말고, 지금 당신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바로 해보세요. 그것이 설사 환상을 만드는 것이나 분열된 자아와의 대화에 불과하더라도.


아마 그럴 수 있다면 지금 당신은 바로 하늘을 나는 "버드맨"의 수준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것이 분명하다. 열린 결론은 "리건"이 그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자신이 되길 결정하고 바로 행동을 취하고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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