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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꿈꾸는회계사 Jan 05. 2023

피할 수 없는 전문직의 숙명, 을(乙)

애증의 클라이언트




 자격증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전문직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최소 2, 3년의 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나의 경우, 그 긴 시간을 견디며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상상력이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면 자본주의의 파수꾼으로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다. 공부하다가 힘들 때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어마어마한 회사의 횡령을 발견해 기자회견을 하는 상상이라든지, 창의적으로 절세방안을 고안해 고객사로부터 인정받아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든지 하는 상상들이었다. 아마 쑥스러워 말은 못 하겠지만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도 분명 비슷한 상상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현실은 상상과는 사뭇 달랐다. 돈을 주고 서비스를 구매한 클라이언트는 전문직을 마음껏 활용할 권리가 있다. 전문직이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적은 돈을 들인 것도 아닌데 당연히 최대한 뽕을 뽑아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시장에서 비슷한 가격대 또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현재와 유사한 퀄리티의 서비스를 손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전문직의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냉정하게 다른 대안을 찾는다.



 

 지난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업계에서 독보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면 힘들게 영업을 할 필요도 없고 흔히 말하는 갑질에 당할 일도 없다. 클라이언트는 제 발로 찾아오고, 오히려 갑을 관계가 역전된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전문직은 그런 독보적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변에 개업한 세무사들이 많아서 종종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가 할 정도로 믿기 힘든 일들이 많다. 밤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시도 때도 없는 전화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쌍욕까지, 상식 밖의 행동들이 난무한다. 그 세무사 중 한 명은 그런 악성 클라이언트로 인해 고통받다가 스트레스성 탈모가 심해져 이제는 거의 신생아급의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운 클라이언트들을 냉정히 쳐내기는 또 어렵다. 더러워서 못 하겠다 싶다가도 눈 앞 직원들의 인건비와 사무실 임차료가 아른거린다. 




 또 신규 클라이언트와 인연이 닿게 되면, 그 클라이언트에서 파생되는 업무들이 꽤 많다.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인맥을 통해서 소개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클라이언트를 잘 구워삶아서(?) 지속적으로 일을 의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 지금의 고객사 담당자가 이직하는 경우 옮긴 곳에서 또 다른 일을 의뢰할 수도 있다. 전문직들의 이러한 업의 특성상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형성이 중요하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우리나라 사회 구조상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고 꼭 전문직들만 겪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전문직 수습 기간이라든지 초년 차에는 이러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많이 고민하게 된다. 전문직 시험에 합격할 정도면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했고 주목받는 인생을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을 깨닫고 현실에 맞춰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늘 갑(甲)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젠 을(乙) 언저리로 한 발짝 움직여야 할 때이다.




 이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예전에 존경하던 선배 회계사 한 분이 떠오른다. 일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술도 잘 먹고, 골프도 준프로급 실력자인 그야말로 사기캐릭터였다. 법인에서도 미래가 보장된 분이었고 메가 클라이언트(흔히 말하는 대기업급)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 야근을 마치고 가볍게 술 한잔한 적이 있는데, 꽤 늦은 시간임에도 그 메가 클라이언트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급하게 들어가 봐야 한다며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던진 그 한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갑질 X나 하네 X새X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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