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 들어와서도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게 남아있었으니, 바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시계’ 때문이었다. 우리가 봐 둔 브랜드의 웹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보란 듯이 예쁜 시계들이 넘쳐났다. 한국이라면 편하게 인터넷으로 주문해버릴 텐데. 이틀이면 충분히 받을 텐데. 이렇게 넓디넓은 미국 땅에서 무슨 수로 이틀 만에 물건을 받겠어. 거기다 우린 마지막 날 일찍 숙소를 떠날 테니 실질적으로는 하루밖에 없는 거지. 만약 주문했는데 우리가 없는 호텔로 물건이 와버리면 아주 그냥 난감해지는 거지... 난 휴대폰을 붙들고는 끊임없이 꿍얼거렸다. 한 번은 남편이 미국의 중고 사이트에서 필름 카메라 타이머를 구입했던 적이 있었다. 그 물건은 받기까지 3주일이나 걸렸는데, ‘배 타고 오나보다.’라고 짐작했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본 경로는 정말이지이해 불가였다. 그 타이머는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미국 땅을 헤매고 다녔다. 한국이랑 가까워지는 방향도 아니고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그렇게 (과장 보태서) 전미를 여행한 타이머는 비행기를 탄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남편 손에 들어왔다. 도대체 왜 그리 미국을 돌아다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우린 그저 미국의 방방곡곡을 여행한 그 타이머를 부러워했고, ‘미국의 배송 시스템은 아직 갈길이 멀었구나.’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니 온라인 주문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려야만 했다. 결국 나는 답답한 마음에 친오빠에게 연락을 했다. “오빠, 가까운 오프라인 매장에는 마음에 드는 게 없고, 다른 매장 가자니 시간이 아깝고, 그렇다고 온라인으로 살 수도 없고…” “온라인으로 왜 못사?” 오빠는 뭐 그런 걸 고민하냐는 듯 내게 말했다.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주문하고, 공항 근처에 있는 아마존 락커에서 코드 입력해서 찾으면 돼. 이틀이면 가능해. 내가 주문해줄 테니까 링크 보내.”
이럴 수가. 무려 이틀 만에 배송이 가능하다니. 택배를 사물함에 넣어준다니. 설령 못 찾아가더라도 환불 처리할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미국의 배송 기술에 정말 놀랐다. 난 미국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구나. 역시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친오빠 덕에 새로운 문명을 맛본 우리는 서둘러 디자인을 골랐다. 우리 둘의 시계와, 친구에게 선물할 시계까지, 그렇게 세 개를 골라 그에게 보냈다. 이번에 찾은 샌프란시스코에는 오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다. 열심히 현지의 팁들을 전해주면서 말이다. 그 덕에 계속 미뤄왔던 숙제를 마친 우리는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DAY9 신혼여행이 끝나기까지 이제 딱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우린 차를 타고 미국 땅을 달리던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하여, 결국 남은 시간 동안 차를 렌트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날 체크아웃을 한 뒤 밤 비행기를 탈 때까지 짐을 둘 곳이 없었기에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먼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렌트를 하려고 알아보니,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우리는 비교적 저렴하고 공항과 가까운 South San Francisco에서 렌트를 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우버를 불러 미리 예약해놓은 렌터카 업체로 향했다. 숙소에서 약 20분 거리였다.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샌프란시스코의 고층 건물들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으려 할 때쯤,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날 흔들었다. “윤정아, 우리 국제 면허증을 숙소에 두고 왔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운전을 할 계획이 없었기에 맘 편히 캐리어에 넣어둔 것이었다.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국제 면허증을 챙겨 나왔다. 그나마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며, 다시 차를 탄 우리는 금방 평화를 되찾았다. 사우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의 한쪽에는 샌프란시스코 만이 펼쳐졌다. 바로 그 위에 내가 좋아하는 뭉게구름까지 두둥실 떠서는 환상의 조합을 뽐내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사우스 샌프란시스코 가는 길.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 만이 보인다.
하지만 렌터카 업체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순탄치가 않았다. 일단, 업체에서 한국 면허증을 요구했는데 남편은 없고 나만 있었다. 숙소에 있다고 했더니 남편이 면허증을 소지하기 전까지는 나만 운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다시 돌아갈 일은 없었지만, 우린 연이은 실수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피곤할 정도로 꼼꼼한 성격이라 이런 일은 잘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왕좌왕하던 우리에게, 유독 어려운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던 그녀는 추가적으로 보험을 들으라고 권했다. 기본적인 보험은 포함된 상태였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듣기로 분명 큰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곳을 떠난 뒤 영수증을 확인해보니, 이것저것 추가가 되어 1박 2일 렌트비가 200불이 넘어있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 뭐라 따져볼 수도 없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빌렸을 텐데…” 난 하루 종일 영수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영어는 잘 못해도, 꼼꼼해서 이런 실수는 거의 안 했었는데. 떨쳐버리고 여행에 집중해야 하는데도 자꾸만 아쉬움이 밀려왔다. 좀 편해졌다 싶으면 꼭 이렇게 한 번씩 언어나 문화의 장벽에 부딪히게 되는 미국 여행이었다. 역시나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이곳이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차 선택권이 없었다. 건네준 키를 받아서 찾아가 보니 놀랍게도 은색의 기아자동차였다. 앞선 일정들에서 운전을 했었기 때문에, 거기다 익숙한 차였기에 난 아주 자신 있게 운전대를 잡았더랬다. 그런데 한국에서 끌던 차와 같은 기종인데도 느낌은 왜 다른 걸까, 같은 미국인데도 샌프란시스코 도시 운전은 왜 이리 또 어려운 걸까...! 나는 처음 고속도로를 들어갈 시점부터 난리법석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운전을 처음 해보는 사람 같았다.
"오빠, 이쪽으로 가야 되는 거야? 오빠, 오른쪽 좀 봐줄래? 오빠!!!!!"
샌프란시스코 도로
아이고,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왜 이리 어색한 것들투성인 건지. 순식간에 적응해버린 줄 알았던 이번 여행이, 끝을 향해갈수록 더 낯설어지는 건 왜일까. 삐질삐질 땀이 났다. 소란을 피우긴 했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는 무사히 Berkeley에 도착했다. UC 버클리 근처의 주차 타워에 주차를 한 뒤, 우리는 Chipotle라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멕시칸 식당으로 향했다. Chipotle, 하면 나에게는 또 창피한 경험이 서려있는 곳이다. 일단 내가 이 식당 이름을 처음 봤을 때는, 당연히 ‘치팟틀’이라고 읽는 줄 알았다. 치팟틀이라고 했더니 못 알아듣던 미국인에게 스펠링을 적어주었더니 치폴레,라고 고쳐준 기억이 있다. 창피함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처음 치폴레에 갔던 날, 나는 메뉴판과 직원 앞에서 눈이 핑글핑글 돌아갔더랬다. 아마 현재 우리나라에 많이 보급된 샌드위치 가게 ‘서브웨이’를 아무런 정보 없이 처음 가본 사람은 내 기분을 알 것이다. 골라야 하는 건 왜 그리 많은 건지, 눈 앞에는 뭔 재료가 그리 많은 건지, 아니 그리고 왜 나만 빼고 다들 능수능란하게 주문하는 건데…! 나는 어리바리하게 평소 좋아하던 브리또를 겨우 주문했다. 그리고 내 이름이 불리고 쟁반을 받아 들었을 때, 난 음식이 잘못 나온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또띠아를 추가해야 내가 아는 그 브리또의 모양이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주문한 것은 ‘브리또 보울(bowl)’이었다. 그릇 안에 브리또의 재료들이 한꺼번에 담겨 나오는 형태였다. 샐러드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시다냐. 처음 보는 모습의 브리또를 포크로 찍어먹으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꼭 제대로 된 브리또를 주문해서 손으로 들고 먹으리라.
그것이 자그마치 5년 전의 일이었으니, 사실 치폴레라는 단어만 들어도 지난날의 수치심이 떠올라 멀리했던 나였다. 이번 기회에 그때의 기억을 만회하리라 다짐하고는 남편과 함께 치폴레로 향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여전히 치폴레의 주문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또띠아를 추가했으니 나름 성공적이었다. 메뉴를 받아보니 내가 아는 그 브리또가 놓여져 있었다. 다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아주 거대한 모습을 하고서. “자, 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그 모습이냐?” 대왕 브리또가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정말이지, 먹어도 먹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손으로 들고 먹기에 성공했다는 다소 어이없는 쾌감을 느끼며, 내 입꼬리는 씰룩씰룩거렸다. 참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