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
DAY8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일정은 거의 즉흥적으로 잡았다. 오늘은 오후 4시에 예약한 맥주 양조장 투어만 빼고 모두 그 순간 떠오르는 곳으로 돌아다니면 되었다. 어젯밤 친오빠가 메일로 보내준 무료 입장권 덕에, 우린 SF MoMA(The Museum of Modern Art; 현대 미술관)에서 오전 일정을 시작했다.
난 예술을 사랑하지만 여행 중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즐겨 찾는 편은 아니다. 작품은 여유를 두고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산만해지고 밖에 나가 구경하고픈 마음이 꿈틀꿈틀거리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클림트 작품들이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 같은 곳들. 왠지 MoMA는 예외인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울 것만 같았다. 그래도 무료 티켓이 생겼으니 들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현대 미술관답게 내부가 세련되고 예뻤다. 친오빠가 혹시 전시를 못 보면 그 안에 있는 카페라도 들르라는 말을 왜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왠지 그런 느낌 있지 않은가. 미국의 세련된 미술관에서, 팔짱을 끼고 전시를 둘러본 뒤, 새끼손가락 치켜들고 커피 한잔 딱 하며 여유를 즐기면 왠지 지성인이 된 듯한 느낌. 어휴, 이런 허세글이 줄줄 써지는 것을 보면 아직 문화인으로서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심지어 나는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관람을 하기 시작했다. 무려 7층이나 되어 규모가 꽤 큰 미술관이었다. 그냥 훑어보고 나가자던 마음과는 달리, 흥미로운 작품이 많아서 자꾸 발걸음이 묵직해졌다. 전시를 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낡은 프린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부르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프린터에서 종이가 끝도 없이 인쇄되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현대 미술은 엉뚱하고도 재미있는 매력이 있다. 우린 그 매력에 빠져서 꽤 오랜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내버렸다. 그중 상당 시간을 기념품 샵에서 보낸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고 치자.
나름 집중해서 문화생활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파왔다. 미술관에서 여유 있게 커피는 개뿔, 한시라도 빨리 음식을 넣어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굳이 멀리 있는 맛집을 찾아가고 싶은 것은 무슨 심보였을까. 사실 여행 중 먹는 재미에 꽤나 큰 비중을 두는 우리이다. 그런데 앞서 대자연 여행을 하다 보니 배고플 때 눈 앞에 보이는 곳이 밥집이고, 숙소가 밥집이고, 마트가 밥집이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유명한 맛집’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더랬다. 결국 우리는 우버를 타고 Brenda’s French soul food라는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 줄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주린 배를 붙잡고 같이 서있는 서양인들을 힐끔힐끔 구경하며 50분쯤 대기했을까. 드디어 남편의 이름이 귀에 들려왔다. 우린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결정해 둔 Shrimp&Grits와 Egg benedict를 정신없이 주문했다. 유명해서 멋모르고 시키긴 했다만 ‘Grits’가 무엇인지조차 몰라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검색해보았다. 바로 ‘굵게 빻은 옥수수’라는 뜻이었는데, 주로 미국 남부에서 즐겨먹는다고 한다. 음식이 나오고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토마토와 옥수수의 향미가 예술이었다. 웬만한 세계 음식은 다 먹을 수 있는 한국에서도, 그간 비슷한 것조차 먹어본 경험이 없다. 오랜만에 정말 새롭고도 황홀한 음식을 맛보았다. 비스킷 위에 수란이 올라간 에그 베네딕트는 맛있긴 했으나 비교적 평범한 맛이었다. 그릿츠가 워낙 특별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계획 없이 움직이자고는 했지만 사실 마음속에 미리 찜해놓은 장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Mission Dolores park라는 공원이었다. 서양을 여행하면 또 푸르른, 아니 초로록한 잔디에 누워 여유를 즐기는 것이 또 하나의 낭만 아니겠는가. 높은 언덕에 위치해서 샌프란시스코의 전망도 볼 수 있고, 널찍한 잔디가 깔려있어서 그 위에 누워 맑고 아름다운 캘리포니아의 하늘도 즐길 수 있고, 또 현지인들이 떠는 수다도 엿들을 수 있고, 또 산책 나온 강아지들도 볼 수 있고, 또 어쩌구 저쩌구…. 아 맞다. 오빠 근데 지금 몇 시야? 뭐? 벌써 그렇게 됐다구? 내 잔디는? 내 여유는? 내 낭만은…??!
점심을 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 있었다. 계획 없는 여행은 이런 점에서 좋지만 동시에 이런 점에서 참 아쉽다. 분명 아침에만 해도 조금만 마음에 두고 있는 정도였는데, 점점 마음이 커져서 안 가면 안 되겠다 싶을 때쯤 우리에게는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한 시간이 어디더냐. 우린 안 가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며 무작정 버스를 타고, 또 트램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트램에서 내리는 순간 저 멀리 펼쳐지는 공원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내가 기존에 알던 공원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층 건물의 전망대 옥상에 거대한 잔디밭이 깔려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올만한 광경들이 내 앞에서 생중계되고 있었다. 마침 주말이라 많은 현지인들이 빽빽하게 앉아서, 혹은 누워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담배나 마리화나를 태우기도 했다. 그 사이에 우리 둘도 자리를 잡고서 잠시 누워보았다. 그동안 완전히 여행자의 신분으로 떠돌고 있었는데, 이 곳에 누워있는 순간만큼은 왠지 나도 샌프란시스코의 현지인이 된 느낌이었다. 구름이 동동 떠다니는 파아란 하늘이 얼마나 예쁘던지.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맥주 한잔 하고 한 숨 잘 수만 있다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우린 여유까지는 못 부리더라도 쉼표, 정도는 부릴 수 있었다. 쉼표,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자, 이제 드디어 맥주를 공부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바로 ‘Anchor’라는 브랜드의 맥주 양조장이었다. 실험복을 입은 직원이 나와서는 Anchor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Anchor가 어떤 맥주를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20여 명의 사람들 중 동양인은 우리 둘 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직원이 농담을 던지면 모두가 깔깔깔 웃는데 나 혼자 어리둥절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이 웃다 말고 내게 통역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하~ 그 뜻이었구나!!”라고 말하며 하하하 웃었다. 그때쯤이면 이미 모두가 웃음을 멈추고 다음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웃음소리는 참 민망하게도 울려 퍼졌다. 해외를 여행할 때마다 영어의 한계에 부딪히고 매번 더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도 매번 그때뿐임에 참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머릿속에 ‘영어, 영어, 영어,….’를 외치며 공장 투어까지 한 바퀴 돌고 나니 드디어 시음 시간이 찾아왔다. 직원이 맥주에 대해 설명해준 뒤 작은 샘플 잔에다가 따라주면, 줄을 서서 그 잔을 받아오는 방식이었다. 그 작은 잔에 담긴 맥주가 얼마나 반갑던지…!!! 여행 중엔 1일 1 맥주를 실천해야 한다며 외쳤던 우리인데 이번 여행 동안은 이런저런 이유로 맥주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원 없이 마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스팀 비어, 흑맥주, 망고 에일, 썸머 비어 등 직원이 나누어주는 다양한 맥주들을 거의 다 시음했다. 아껴먹고 싶은데도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어가버리는 그 개운함! 오랜만에 마셔서일까. 아직 6시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한껏 알딸딸해졌다.
그렇게 조금 발그레해진 채 양조장을 나왔다. 언덕배기의 연속인 샌프란시스코의 길이 더더욱 예뻐 보였다. 나는 풍선처럼 붕붕 뜨는 마음을 굳이 가라앉히지 않았다. 그저 신이 나서 길거리를 뛰어다녔고,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잇몸을 한껏 드러내며 웃었다. 유니온스퀘어로 가는 버스가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소곤소곤 노래를 부르고, 두 손을 맞잡은 채 둥실둥실 흔들며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 몸에서는 왠지 상큼한 맥주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우린 유니온스퀘어에 있는 치즈케이크 팩토리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치즈케이크 팩토리는 전형적인 미국의 레스토랑 중 하나인데, 특히 샌프란시스코 지점은 높은 층에 위치해있어 전망이 예쁘다.
엘리베이터부터 줄 서서 들어가는 걸 보고는 불길하다 싶었는데 올라가 보니 완전 도떼기시장 저리 가라였다. 역시나 대기도 1시간이나 있었다. 우린 대기를 걸어놓고, 아래층에 있는 몰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소화도 시켰다. 방금 유부녀가 되어서 그런 걸까. 생전 처음으로 식기나 인테리어 소품들에 눈길이 가는 것이 참 신기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가 우리 차례가 되었다. 유니온스퀘어 야경을 볼 수 있는 테라스 자리도 있었지만, 덜덜 떨면서 차가운 음식을 먹고 싶진 않았다. 실내로 들어가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음식은 역시나 맛있었고 역시나 양이 흘러넘쳤다. 서양에서는 맥주를 liquid bread, 즉 액체 빵이라고 부른다던데. 앞서 그 액체 빵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우린 결국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기권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음식도 남기고, 치즈 케이크 공장에서 치즈 케이크도 먹지 못한 채로 식당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