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 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
여행 중 그 지역의 대학교를 구경하는 일은 참 흥미롭다. 특히 명문대학교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캠퍼스의 낭만을 상상하는 일이 가장 그러하다. 물론, 안타깝게도 당사자들은 낭만보다는 힘든 학문의 길을 걷고 있겠지만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유명한 대학은 스탠퍼드 대학교와 UC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참고로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와는 관련이 없다.)가 있다. 그중 우린 다음 목적지인 금문교와의 동선을 고려하여 UC 버클리로 정했다.
우린 캠퍼스에 들어서자마자 숲을 발견했다. 카메라 앵글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큰 키를 가진 나무들이 빼곡하게 서있었다. 마치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어딜 가나 이토록 자연친화적인 미국의 대학교가 조금은 부러웠다. 건물이 차지하는 부지와 자연이 차지하는 부지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이 역시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우린 괜히 이 학교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이곳은 길에서 만난 다람쥐마저도 무언가 남달랐다. 캠퍼스를 자연스럽게 뛰노는 다람쥐들이 너무 신기해서, 남편이 가방 안에 있는 카메라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다람쥐가 남편의 다리를 타고 무려 허리까지 호다다닥 올라가더니, 남편의 가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호다다닥 내려가는 것이다. 아무래도 간식이 나올 것을 기대한 모양이다.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경험에 괜스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인간이 이렇게나 쉽게 다람쥐와 맞닿을 수 있다니!
우린 이곳 캠퍼스의 분위기에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 보니 근사한 시계탑이 있는 광장에 다다르게 되었다. 마침 잔디밭도 보이길래 우린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Mission dolores 공원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만끽하지 못했던 여유를 이곳에서 실컷 누렸다. 정말이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우리처럼 잔디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거나 수다를 떠는 학생들, 배낭을 메고 바쁘게 지나가는 학생들, 캠퍼스 투어를 하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손자와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까지 보였다. 할아버지는 방방 뛰어다니는 손자를 열심히 쫓아가시다가, 이내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헥헥, 가쁘게 숨을 내쉬곤 하셨다. 그 속도 모르고 마냥 신나 버린 손자의 뒷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힘을 내서는 다시 그 뒤를 쫓아가시곤 했다. 역시 가끔은 가만히 멈춰 서서 사람 사는 모습만 지켜봐도 참 행복해진다. 그 감정을 좀 더 느끼고 싶었기에, 여행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을수록 내 눈은 사람들의 모습을 좇는 데에 집중했다.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리는 초록색 잔디처럼 내 마음도 함께 나풀거렸다.
UC 버클리에서 실컷 여유를 즐긴 우리는 학교 앞 기념품샵에 들른 뒤에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봐준 친구 P의 요청 때문이었다.
친구 P는 초등학생 때 성당에서 처음 알게 된 이후로 20년이 넘은 친구 사이이다. 그에게 사회를 부탁한 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사회를 부탁하면 응당 정장 세트 정도는 선물해주는 것이 정석이라는 글들이 보였다. 나 혼자 고민해서 될 일은 아닐 것 같아서 P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정장 있냐. 응, 있어. 구두는? 있어. 고급 지갑은? 있어. 아이, 그럼 어쩌지. 우리 사이에 그냥 편안하게 너 필요한 거 얘기해주면 안 되겠냐.
그는 고민해본 다음 얘기해주기로 했다. 만약 부담스러워한다면,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현금을 쥐어 줄 생각이었다. 그는 얼마 후에 내게 말했다. 요즘 본인이 츄리닝에 빠져있으니 츄리닝 세트로 사달라고. 아니, 남들은 정장 세트를 사주는 판에 웬 츄리닝 세트? 그는 츄리닝 세트 가격도 만만치 많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선물이라고 답했다. 조금 웃기긴 했어도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 오히려 마음에 쏙 들었다. 입지도 않는 정장이 두 벌이면 뭐하나. 그가 원하는 디자인을 찾아서 정보를 주면 내가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묵묵부답인 것이다. 다시 연락을 해서 물어봤더니, 본인은 축하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뿐인데 무언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역시 나중에 현금을 쥐어주는 게 좋겠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P가 덧붙였다.
“나 후드티 잘 입는 거 알지? 그, 미국 여행 가면 기념품샵에서 거기 도시 이름 쓰여있는 후드티 꼭 하나씩 팔잖아. 그거나 예쁜 걸로 하나 사다 줘. 나 후드티 한 번 사면 십 년도 입어. 너랑 형이 사다 주면 그것도 십 년 동안 입을게. 그게 제일 뜻깊을 것 같아.”
참, 그 친구다운 결론이었다. 진심이 담긴 이 친구의 손에 현금을 쥐어줄 수는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그가 요청한 후드티를 사 가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시계를 사며 그의 시계도 함께 사기로 한 것이었다.
UC버클리 기념품 샵에 들어가게 된 데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미국은 본인이 다니는 대학의 로고가 박힌 옷을 많이 입는 편이라서 기념품처럼 촌스럽지 않은, 다양한 디자인의 후드티들이 걸려있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P의 후드티를 고르고는 우리의 후드티까지 함께 골랐다. 이번 여행 중 구입한 기념품들 중에서도 가장 실용적이고 예쁜 기념품이었다.
우린 주차장으로 돌아가 차에 탔다. 이제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금문교(Golden gate bridge)에 갈 차례였다. 나는 앞서 샌프란시스코를 두 번 와보았지만 정작 금문교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소살리토라는 마을에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아주 멀리서 그 실루엣을 본 것이 전부였다. 역광 때문에 그 붉은 빛깔을 보지 못한 채 지나야만 했던 그 아쉬움을 오늘에서야 풀 수 있게 되었다.
우린 버클리 지역에서 출발하여, 샌 라파엘 지역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지나 서쪽으로 넘어갔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남쪽으로 쭉 내려갔다. 소살리토 옆을 지날 즈음이 되자 드디어 금문교의 머리꼭지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저기 봐! 나온다, 나온다, 나온다!!!!”
남편과 나는 얼굴까지 끓어오르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우리가 직접 금문교를 건너고 있었다. 그 빨간 기둥을 지나가는데, 마치 평소 흠모하던 유명인사를 코 앞에서 본 것처럼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때 우리의 낯빛은 마치 금문교처럼 붉어졌는데, 흥분에 의한 것인지 다리에서 반사되는 빛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레고 모형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빨간 립스틱 짙게 칠한 여인처럼 섹시한 이 다리가 상상 그 이상으로 근사하다는 점만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금문교는 해안에 위치하여 부식이나 내구성에 대한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지 보수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고, 페인트도 매 년 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어진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새로 지은 다리처럼 아주 싱싱해 보였다.
운전해서 다리를 지나가버리니 순식간이었다. 우린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금문교 Welcome center를 찾았다.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온 관광객들은 모두 이곳에 집합해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도 많았다. 우린 구글 지도의 힘을 빌려 급히 다른 곳을 찾아보았다. 그리고는 근처에 위치한 Golden gate overlook이라는 전망 포인트를 찾아서 이동했다.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주차 자리도 많고, 금문교도 잘 보이고, 산책로도 있고 또 무엇보다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하니 좋았다. 우린 차에서 내리자마자 날쌘 바람의 공격을 받으며 산책로를 걸었다. 참, 운도 좋지. 날씨와 지형 탓에 안개 없는 금문교의 모습을 보는 일은 쉽지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금문교를 볼 수 있었다. 행운의 여신이 우리의 신혼여행을 빛내주고 있었다.
속이 뻥 뚫리는 푸른 바다와, 좁은 해안에 이따금씩 밀려와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그 바다로부터 몰려오는 강력한 바람과, 그 바닷바람을 타고 와 혀로 닿는 짠맛을 느꼈다. 사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었던 나다. 금문교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다리 중 하나이지만, 막상 가보면 명성에 비해 별거 없다는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친오빠는 개인적으로 금문교보다는 베이브릿지(금문교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접근성이 더 좋고, 밤에 불이 들어와서 야경이 눈에 띄는 다리. 관광객들이 금문교와 많이 혼동한다고 한다.)가 더 예쁘다고 했었기에 나도 금문교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장 완벽한 날씨에, 가장 아름다운 금문교의 모습을 보아버렸고, 진부할지언정 ‘샌프란시스코’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 빨간색의 금문교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하면 골든게이트 브릿지. 그것이 바로 정석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