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하프 문 베이, 샌머테이오(캘리포니아)
브런치에는 7월부터 올렸지만, 쓰기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서야 완결을 하네요. 마지막 문장을 완성시키고 나서는 감격의 눈물이 다 나더라구요. 소중했던 순간들을 글로써 영원히 남길 수 있다는 사실에 참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화에 담긴 저의 아쉬움도 함께 느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DAY 10
끝내 마지막 날이 와버리고야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떠나는 비행기가 밤 12시라는 사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꽉꽉 채워서 쓰기로 마음먹고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와 대중교통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있는 Ferry building으로 가서 마켓도 구경하고, 그 옆의 Rincon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양 유독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말이다. 그 흐린 하늘 아래 쭉 뻗어있는 회색빛의 Bay bridge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산책을 마치고, 우린 점심을 먹기 위해 Sears fine food라는 브런치 식당으로 이동했다. 1938년에 오픈한 곳이니 무려 80년이 된 집이었다. 우리나라에 원조 순대국밥이나 원조 닭갈비집이 있는 것처럼 여기도 ‘80년간 대를 이어온 브런치 원조 맛집!’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오래된 식당답게 미국 특유의 아기자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우린 수제버거와 오믈렛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왠지 미국의 한 가정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아주 제격이었다.
남은 오후 시간 동안은, 샌프란시스코 서쪽으로 이동해서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친구들과 국내 해안도로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남편의 제안이었다. 숙소에 들러 짐을 챙긴 뒤 주차장에 가서 차를 탔다. 그리고 북서쪽을 향해 달려서 바다 여행의 시작점이 될 “Sutro Baths”라는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 도착한 뒤 우린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별생각 없이 구글 지도에서 북서쪽의 꼭짓점에 보이길래 찾아간 것인데, 이곳도 하나의 명소였던 것이다.
“우와, 윤정아! 여기 좀 봐! Bath라는 이름이 진짜 욕조 모양이라서 붙여진 건가 봐!!”
예상치 못했던 풍경에, 남편은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말에 나 역시 감탄사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공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연히 마주한 풍경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우린 그 소중한 순간을 열심히 마음속에 담았다.
그렇게 우린 Sutro Baths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남쪽으로 주욱 내려가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Half moon bay 지역의 해변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달리는 길 내내 오른쪽 차창 너머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다가 격하게 넘실거리며 그 기세를 자랑했다. 침울했던 날씨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쾌청한 하늘을 드러내 주었다. 한 절반 정도 갔을까? 우린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몹시 나른해졌다. 여행 내내 불쑥불쑥 찾아오는 이 졸음을 피하려 애써왔지만, 오늘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린 쏟아져오는 졸음마저 즐겨보기로 했다.
언덕 위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우리의 눈 앞에는 유채꽃처럼 보이는 노란 꽃밭이, 그리고 그 뒤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태평양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근사한 전망을 배경으로 우린 차 시트를 최대한 젖힌 다음 선글라스를 끼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백열등처럼 황금빛을 내는 태양과 노란 꽃들이 완성시킨 풍경에서, 이따금씩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따듯한 기운이 온 피부로 느껴졌다. ‘단잠’이라는 단어는, 나른한 시간에 한숨 푹 자고 나면 정말 혀에서 달달한 맛이 나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생각보다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서 음냐음냐 입을 다셔보니 정말이지 입에 꿀을 머금은 양 달콤했다.
한결 개운해진 우리는 하프 문 베이로 향했다. 하프 문 베이. 이름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그 지역에 있는 해변 여러 군데를 들러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Poplar beach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투박한 절벽산 앞에 펼쳐진 광활한 모래사장과 바다는 한치의 꾸밈없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런 건축물도, 그 흔한 노점상조차도 보이지 않는 해변은 난생처음이었다. 절벽, 모래, 바다, 사람. 그것이 이곳의 전부였다.
우린 절벽 아래의 좁은 그늘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양말을 벗은 뒤 모래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는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바다를 감상했다. 거친 야생의 미를 뽐내는 바다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 미국 여행의 큰 묘미 중 하나였다.
바다와 멀찍이 떨어진 그늘에 자리를 잡은 우리와 달리, 파도가 밀려들어오면 금방이라도 덮칠 것만 같은 위치에 한 여자와 늠름한 개가 태양빛을 맞으며 누워있었다. 모래사장과 한 몸이 되어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지겨워질 때쯤이면 한 번씩 일어나 바로 앞에 있는 파도로 돌진하곤 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로 뛰어가는 그들의 실루엣은 그 배경보다도 찬란했다. 그 개는 두 다리가 없었다. 하지만 남은 두 다리만으로도 그녀와 아주 씩씩하게 바다를 뛰어다녔다. 이따금씩 바닷물이 튀기는 모습이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장면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그렇게 계속 앞쪽을 바라보며 쉬고 있는데, 이윽고 우리 눈 앞에 말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말? 웬 말…? 나는 눈을 비볐다. 모래사장을 거니는 말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모자를 쓴 아저씨가 말을 타고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유럽 여행을 하며 관광용으로 채찍질당하는 말은 여러 번 본 적 있다. 아니면 제주도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 무리라든지. 그런데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말이라니, 이런 광경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속도로 모래길을 지나갔다. 어떠한 채찍질도 없었다. 그저 고삐를 잡고 방향만 잡아줄 뿐,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그저 그렇게 느릿느릿.
그 여자와 개도, 그 남자와 말도, 서로가 진정한 친구처럼 보였다. ‘주인’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정말이지 어색할 정도였다. 우린 가만히 앉아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법을 배웠다. 천천히, 느리게, 가만히, 멍하니. 그저, 발가락만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면서.
2시간 정도 쉬었을까, 우린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자연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프 문 베이에서 동쪽으로 가면 ‘샌머테이오’라는 지역이 있다. 그곳엔 Crystal Springs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는데, 이 길쭉하게 생긴 호수를 끼고 주욱 뻗어있는 산책로가 하나 있다. 바로 ‘Sawyer Camp Trail’이라는 곳이다. 이 공원 역시 친오빠가 가끔 찾아가서 책도 읽고 여유도 만끽하는 장소로, 현지인만 알 수 있을 만한 숨겨진 명소였다.
우리는 호수와 그 건너편의 산을 바라보며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스쳐갔다. 한 남자는 화려한 성조기가 그려진 반바지인지 사각팬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의만 입은 채 조깅을 하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게임에서 진 뒤 반칙으로 사용될 만한 의상인 것 같은데. 역시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미국다운 모습이었다.
천천히 걷던 우리는 이내 벤치에 앉아 그 고요한 풍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수면 위로 태양이 투영되어 은빛으로 눈부시게 찰랑거렸다. 그 앞에서는 갈대가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정말이지 평화로운 오후였다. 눈동자 앞에 상영되고 있는 피사체들은 그저 느리게만 지나갔다. 세상이 거의 멈춰버린 듯, 아주 천천히.
이대로 이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오빠, 우리 여기서 살자. 그냥 돌아가지 말자. 응?
급기야는 그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이곳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임이 점점 뚜렷해졌기에, 곧 열흘 간의 여정과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에, 억지스러운 생떼라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윤정아, 나도 진심으로 여기서 살고 싶다. 이런 공기 좋은 곳에서, 이런 여유로운 곳에서, 이런 자유로운 곳에서.”
남편도 아쉬운 마음에 울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샌프란시스코의 필수 코스인 케이블카도 타지 못했고, 그 유명한 실리콘 밸리도, 롬바드 스트릿도, 소살리토도 가지 못했지만 남편은 오히려 이번 여행에 매우 만족했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우리만의 장소들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과는 다르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버렸다. 우리는 반짝이는 그곳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다.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마트까지 들르고 나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우린 공항 근처의 아마존 락커에 들러 우리의 시계와 친구 P의 선물을 찾은 뒤, 렌터카를 반납하러 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빨리 떨어지기 싫은 우리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렌터카를 반납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아서 한참이 걸렸다. 겨우 반납을 성공하고는 공항으로 가는 셔틀에 급히 올라탔다. 자연 속에서 그렇게나 여유를 부렸건만. 마지막에는 서둘러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5월 1일의 밤. 우린 끝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해변의 모래알 반짝이듯 여행의 모든 순간들이 반짝였다. 카납에서 본 밤하늘이. 돌기둥 사이로 올라오던 붉은 태양이. 소란스럽게 내 얼굴을 파묻던 남편의 등판이. 샌프란시스코에 떠오르던 거대한 달이.
"찬란했던, 미서부 신혼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