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지구는 돌고, 해가 지면 마땅히 달이 뜨는 법.

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

by 온정

바닷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우린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제 Fisherman’s Warf라는 곳으로 가서 저녁도 먹고 놀다가, 해가 지면 Twin peaks라는 전망대에 가서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피셔맨스 와프는 부두 근처에 위치한 관광명소인데, 우리나라 인천의 월미도 유원지 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물론 규모는 피셔맨스 와프가 훨씬 크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린 비교적 저렴한 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하고, 15분 정도 걸어서 피셔맨스 와프에 도착했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비릿한 바다의 냄새를 맡으며 활기찬 거리와 상점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피어 39라는 유명한 부두에 도착하자, 해수면의 나무판자 위에 바다사자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햇빛을 받으며 널브러져 있는 그 모습들이 마치 할머니가 양지바른 곳에 널어놓은 무말랭이 같았다.

피어 39의 마스코트, 바다사자들

귀여운 바다사자까지 보고 나니, 이후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이곳은 해 질 녘과 야경이 예쁜데 대낮의 경치는 생각보다 평범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려면 두 시간 넘게 남았으니 여유롭게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부두답게 주변에는 각종 해산물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우린 그중 내부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 새우, 오징어, 생선 등 각종 튀김이 함께 나오는 메뉴와 연어, 새우 등을 바비큐 구이 한 메뉴를 주문했다. 식사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우린 6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다 보니 1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윤정아, 이제 대략 40분 정도 기다리면 해 지겠다. 그치?”
“응. 오빠. 근데 우리 여기 있는 시간 동안 뭔가 큰 감흥이 없지 않았어? 물론 여기 노을이 예쁘긴 한데… 앞으로 40분 동안 또 뭘 하지, 싶어. 차라리 트윈 픽스에 가서 노을도 보고 야경도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
“…!!!”


해가 지는 시간은 8시였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딱 40분이었고, 피셔맨스 와프에서 트윈 픽스까지는 차로 30분가량 걸렸다.
“여기요! 계산서 주시고, 남은 음식 포장해주세요!”
남편은 급히 직원을 불렀다. 느릿느릿한 직원 덕에 10분가량을 또 까먹어버렸다. 우린 한 손에는 포장한 음식을 들고 남은 한 손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주차장까지 질주하기 시작했다. 15분가량 걸어온 길을 10분 만에 도착했다. 이제 해가 지는 시간까지 딱 20분이 남았다. 남편은 서둘러 운전을 시작했다.


“오빠. 8시 정각에 해가 밑으로 휙 떨어져 버리는 건 아니니까, 시간이 조금 지나서 가도 예쁜 노을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안전하게 천천히 가자. 혹시 못 보더라도 괜찮아. 해 질 녘의 샌프란시스코 골목들을 볼 수 있잖아?”
그도 그럴 것이, 피셔맨스 와프에서 트윈 픽스를 가는 경로는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심장부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우리의 차는 복잡한 관광지를 벗어나 주택가를 누비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골목골목에 있는 오래된 집들은 유럽풍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이 많아서,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샌프란시스코의 또 하나의 특징인 ‘언덕’을 제대로 체감했다. 한 블록을 지나갈 때마다 차는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했다. 한 번은 꽤 높은 언덕까지 올라가다가 교차로를 만나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등이 좌석에 찰싹 달라붙는 바람에 시야에 하늘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중력을 거스르며 좌석에 붙으려는 등을 억지로 떼어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운전은 안전하게 해야 하니까 말이다. 교차로를 지나자 다시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정말이지, 덜컹덜컹거리며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의 한 장면 같았다. 예쁜 이 길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지나가면 더 좋았겠지만, 다급하게 지나가는 와중에도 나름의 스릴과 재미가 더해졌다. 가는 도중 어느새 8시는 지나버렸고, 하늘은 아주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주택가

구불구불한 산길 운전까지 끝내고 마침내 트윈 픽스에 다다른 우리는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그 시점에 이미 하늘은 주황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트윈 픽스는 노을을 보기에 그리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늦는 바람에 해가 기울기 시작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해가 지는 서쪽 방향에는 산이 있어서 이미 둥근 해를 다 가려버린 뒤였다. 먹던 밥도 뿌리치고 달려왔는데… 그냥 피셔맨스 와프에서 평화롭게 일몰을 볼걸 그랬나 보다, 싶기도 했다. 아쉽긴 했지만 일단 기다렸다가 야경을 보기로 하고 차에서 나왔다. 그런데 차 문을 열기가 힘들 정도로, 내 눈에 낀 렌즈가 날아가버릴 기세로, 내 손에 든 카메라가 날뛸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부는 것이다.
주차장에서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야 완전한 정상이 나왔기에, 우린 에베레스트산을 배경으로 눈보라를 헤쳐나가는 등반인들마냥 바람을 헤치며 한 발자국씩 겨우 나아갔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이지 이 바람이 나를 쓰러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찰싹 붙어서 서로를 꼭 쥔 채로 겨우 정상에 올랐다. 100여 개의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도 우린 마치 큰 일을 해낸 것처럼 뿌듯했다. 이미 산 뒤로 넘어가버려서 보이지도 않는 해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자몽 주스처럼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려 내려다보면 360도 모든 방향에서 각기 다른 샌프란시스코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특히 해가 지고 있는 방향에서 180도 몸을 돌리면, 샌프란시스코 도시부터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샌프란시스코 만(bay)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끝내주는 전망이 있었다. 해는 못 봤지만 참 근사한 풍경이었다. 우린 바람 때문에 몸을 지탱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세를 한껏 낮추고 최대한 버텼다. 찍는 사진들마다 흔들려버렸지만 그래도 굳세게 셔터를 눌러댔다.

그때였다. 동쪽의 머나먼 구름 위로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동그란, 바로 ‘달’이었다. 꿈인가….? 꿈이라기엔 내 볼을 때리는 바람이 너무 매웠다. 내 코를 때리는 바람 덕에 콧물까지 줄줄 나고 있었다. 눈물도 함께 나오는데 이건 대체 바람 때문일까, 감격해서 나오는 것일까.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달. 실제로는 훨씬 거대한 크기의 달이었으나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았다.


“오빠. 혹시 지금 이거 꿈이야….?”
“아니, 윤정아. 꿈 아니야. 우리 지금, 월출을 보고 있어. 나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살면서 월출을 이렇게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해를 보러 왔다가 말이다. 우린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서로를 따듯하게 껴안은 채, 낮게 깔린 구름 위로 달이 천천히 떠오르는 모습을 감상했다. 거세게 부는 바람마저도 황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새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우주의 별들은 회전을 하고,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세상의 진리이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그 일에는 인생의 진리 또한 담겨있었다. 지는 해만 바라보고 있다 보면 바로 뒤에서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며 떠오르는 달을 놓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한 면만 기대하고 살아간다면, 해가 져버리는 순간 실망할 것이다. 지나가버린 과거에만 집착하고 살아간다면, 이미 보이지도 않는 해가 남긴 붉은 자욱들만 응시하다가 결국은 깜깜한 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면 다른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반대편에 뜨는 달을 바라보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히 우리가 기다리던 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돌고 돈다는 것. 그 진리를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하며 ‘혹시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모뉴먼트 밸리에서 일출을 보았을 때, 와입만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났을 때. 그리고 이곳, 트윈픽스에서 커다란 달이 떠오르는 장면을 봤을 때였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게 꿈이야, 생시야?”라는 말을 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토록, 내 눈앞에 펼쳐지는 일이 진정 믿기지 않았던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처럼, 혹시 내가 TV쇼의 세트장에서 공들여 만들어진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엉뚱한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정도로, 그럴 정도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순간들. 난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에 와서, 그렇게 인생에 손꼽을만한 순간들을 남편과 함께하고 있었다.


“오빠. 우리가 앞으로 남은 일생을 함께하면서, 이렇게 특별한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으면 좋겠다.”
“분명 그럴 수 있을 거야. 매 순간 특별하게 살자, 우리.”

금방이라도 감기에 걸릴 것 같았기에, 달이 어느 정도 높이 뜬 뒤 우리는 차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건물들에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완연한 밤이 찾아오자 다시 나가서 그 야경을 감상했다. 역시나 샌프란시스코의 낭만은 바람에서 시작하여 바람에서 끝나고 있었다.

차에 들어온 뒤에도 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동의 트윈픽스를 뒤로하고, 린 숙소 근처로 돌아와 한 주차 타워에 차를 세운 뒤 호텔까지 걸어갔다. 짙게 깔린 어둠이 무서워 총총총 걷던 우리에게 작은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지나 차이나타운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언덕길을 오르려다 말고, 우리 둘은 동시에 그 가게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 후 눈을 마주치고는 서로의 생각을 읽어내고 웃었다.
“마지막 밤인데 맥주 한잔 정도는 해줘야지!!!”


그렇게 우린 500ml나 되는 큰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숙소에 들어왔다. 테이블도 마땅치 않은 좁아터진 호텔에서, 우린 침대 위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감자칩 봉지를 펼치고 건배를 했다. 소박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는 조금 알딸딸해진 상태로 수첩을 열고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일기를 썼다. 정말이지 한 순간도 빠뜨릴 구석이 없었다. 우린 울고 웃었던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벌써부터 아련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마지막 밤을 장식한 우리는,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서는 잠이 들었다.




'트윈픽스'는 말 그대로 피크가 두 개라는 뜻입니다.
트윈 픽스의 노을
트윈 픽스의 야경
엄청난 바람 소리, 한번 느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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