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족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대감이 없었다.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고 할아버지는 오빠와 나를 예뻐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폭력이 심했다. 밖에서는 가정적인 남편인 것처럼 보였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화목하기만 한 집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우리는 불화를 겪느라 화목할 틈이 없었다. 싸우고 때리는 소리, 던지고 부수는 소리, 비명 지르고 우는소리.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깨진 유리조각이 심장에 와서 박히는 것 같았다. 늘 불안하고 무서웠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을 수 없었고 대신 맞을 수도 없었다. 우리 집이 남들과 다르다는 건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처음 알게 됐다. ‘사이좋은 부모님도 있구나. 웃고 지내는 가족도 있구나’ 친구가 부러웠다. 우리 집이 창피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밝은 척 웃었다. 찢어지고 짓무른 마음을 숨기고 싶어서 친구들을 만나면 일부러 더 크게 웃고 활발하게 얘기했다.
방학이면 할머니 댁에 다녀왔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계곡에서 물고기 잡고, 밭에서 감 따고 놀았다는 말을 웃으며 듣고 있기만 했다. 나는 할 얘기가 없었다. 추억이 가난한 아이였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귀촌해서 열심히 일을 만들고 남편과 해나가고 있는 이유가. 그 시절 못 만들었던 추억을 이제 와 쌓고 있다. 돼지 저금통에 동전 넣듯 울타리를 만들고, 배추 심으면서 추억 저금통에 저축하고 있다.
감사한 분들 덕분이었다. 우리가 뭘 알겠나 시골의 생활을. 서울에서 태어나 서른둘이 될 때까지 서울에서만 살았던 나였다. 부산 사람이었던 신랑 역시 농촌의 삶을 알지 못했다. 내가 '삼촌, 숙모, 형부, 언니, 감독님,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동네 분들 덕분에 이곳에 적응해 살 수 있었다. 우리를 조카처럼 동생처럼 챙겨주셨다.
아기가 된 것처럼 걸음마부터 배웠다. 하다못해 장작을 쪼개기 전 도끼 쥐는 법도 배워야 했다. 고추는 심기만 하면 밥상 위에 저절로 올라오는 줄 알았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 알려주는 대로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약쳤어?’ ‘비료줬어?’ 한 번씩 검사도 하시면서. 남편과 나 둘이서는 절대 못 할 일이었다.
그분들이 안 계셨다면 여기서의 삶이 이만큼 행복하진 않았을 것이다. 반죽만 한 움큼 들어간 붕어빵 같은 생활이었을 거라 확신한다. '삼촌, 숙모, 형부, 언니, 감독님, 여사님'은 우리에게 붕어빵의 팥앙금 같은 존재다.
내 추억의 나이테는 서른둘 이후부터 촘촘해졌다. 나는 이제 가난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