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는 제발 한국어로
하도 더워서 몸이 축축 늘어지던 날이었습니다. 고속 노화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당 충전을 하러 갔습니다.
버스정류장 앞 공중전화 박스입니다. 빨간색과 보라색 자전거 휠이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 얼마 후에 지나칠 때에도 같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옆의 이발소등, 안쪽에 붙여진 정치 집회 전단지도 일부러 깔맞춤한 듯하네요.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하노이 커피에 갔습니다. 가게 자리가 한동안 비어 있었는데 작년엔가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에 지나면서 나중에 들러보자고 남편과 이야기하는데 옆의 미용실 사장이 "꼭 와주세요!"라고 말하더군요. 아마 미용실과 카페 주인이 같은 사람인가봐요.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건 칠판을 활용한 메뉴판입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쓰이던 초록색 칠판이네요. 메뉴 수정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베트남인 사장님이 직접 쓰셨다네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번창을 기원하며 쓴 느낌이 물씬 났습니다. 자꾸 볼수록 은근히 글씨체가 예뻐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알파벳으로 적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영어 메뉴판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코코넛 밀크 커피. 가장 마음에 든 메뉴입니다. 갈 때마다 조금씩 디자인이 바뀌어요.
앉으면 팝콘 한 접시를 그냥 줍니다. 메뉴는 보시는 바와 같이. 요즘 저는 뭔가 먹기 전에 사진을 찍는 습관을 들이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베트남 노래가 아주 작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먹고 마시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단 걸 먹으면서 읽는 피에르 루이스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진짜 웃기더군요.
베트남 커피 덕분에 며칠 생존(?)할 기운을 얻어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끔 볼 수 있는 세모난 땅에 모양대로 지은 건물입니다. 세모난 집에 사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해요. 왼쪽에 잘려서 찍힌 세븐일레븐은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최근에 생긴 술집인데, 가끔 색소폰 소리가 들립니다. 사다리꼴 모양으로 지었는데 검정색 패널로 그럴듯하게 익스테리어를 했습니다. 연두색 간판과 은근히 어울립니다. 어르신들이 색소폰을 참 좋아하죠. 문화다운 문화생활을 그나마 하려면 서울(저는 서울의 문화생활도 매우 빈약하다고 봅니다)로 가야 하죠. 색소폰 술집을 볼 때마다 광주에서 문화생활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