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미국 대선이 끝났다. 선거인단 수로 트럼프 312, 해리스 226이 나왔다. 상하원도 모두 공화당이 가져갔다. 이 정도면 압승이라, 선거 이후의 미국 국론 분열은 당분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내 생각에는 트럼프 승리라기보다는 해리스의 패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보는데, 몇 가지를 정리해둔다.
1. 미국 남자는 대통령으로 여자나 비백인은 안 찍는다.
이번에 여론조사가 거의 다 틀렸다. 맞춘 사람이나 업체가 기억 안 날 정도다. 네이트 실버, 앨런 릭트만, 영국 이코노미스트 등등등. 트럼프 당선될 때에도 여론조사가 하도 틀려서 그 이후로 업체들이 그야말로 칼을 갈고 닦았다. 그 이후 바이든 당선은 맞췄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번 여론조사에서 샤이 트럼프가 없다고들 했지만 생각보다 많다는 게 드러났다. 미국 백인 남성의 62퍼센트 정도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사실 그동안 트럼프는 조사받으러 다닌 것 말고 한 게 없고 그건 지지자들도 안다. 지금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는 '쪽팔린' 짓이다. 그래서 여론조사 의뢰에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슬며시 조용히 여자친구나 아내, 딸 몰래 트럼프 찍는 남자들이 있는 것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트럼프 욕 나올 때 말없이 휴대폰 꺼내서 확인하는 남자,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줄 안다. 그래서 입다물고 있다가 투표장에서 조용히 트럼프 찍고 나왔다. 그래서 여론조사에 안 잡혔다.
사실 이 부분은 민주당도 알고 있기에 월즈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지명까진 좋았다. 그런데 토론에서 밴스에게 너무 밀려버렸다. 그게 지지가 밀리는 단초가 됐다.
2. 해리스는 생각보다 경력이 짧다.
해리스는 올해 60세로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제 63세인 걸 치면 그다지 젊은 정치인은 아니다. 정치 경력도 비교적 늦은 57세에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당선으로 시작했다. (오바마는 36세에 처음 상원의원이 되었다) 근거지는 캘리포니아라 선거인단 숫자는 많지만, 워싱턴에 네트워크나 기반이 탄탄하다고 보기에는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 그리고 이번에 선거에서 처음으로 졌다.
바이든과 러닝메이트로 뛰었지만 그때 대단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바이든이 당선될 거라는 예측이 별로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트럼프가 선거운동 기간 중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을 때 낙선을 예상했다. 바닥을 미친듯이 돌아다녀야 할 시점에 감염되었으니 결과는 빤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해리스는 상원의원에 한 번 당선되었고 전국단위 선거에 두 번째 출마했다. 전국단위로 이름을 알리리기에 부통령 직함은 부족했다. 누구나 바이든이 다시 출마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해리스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암살 시도로 바이든이 후보 자리를 넘겼고, 해리스는 모든 것을 서둘러야만 했을 것이다.
다행히 트럼프는 다음 번에 출마하지 못한다. 사실상 해리스는 지금부터 대통령 선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민주당이 정신을 차린다면.
3. 아 맞다, 학벌
지금도 미국 정가는 학벌이 먹힌다.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하버드나 최소한 예일 졸업장이 필요하다. 로즈 장학생이라면 더 좋다. 클린턴 부부는 둘 다 예일 로스쿨이었고 오바마 부부는 하버드 로스쿨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가로 진로를 잡았고 학생 시절에 동기 선후배, 교수들 사이에서 대통령감으로 지목받았다.
해리스는 하워드 대학을 졸업했다. 흑인이 최초로 입학한 대학교로 토니 모리슨이 동문인 곳이다. 만약 해리스가 정치에 뜻이 있었다면 하워드 대학 졸업 뒤 미국 동부의 명문대 로스쿨에 진학했을 것이다. 예일 로스쿨같은 미국 부동의 1위 대학원 말이다. 그렇지만 해리스는 캘리포니아 헤이스팅스 로스쿨에 들어갔다. 캘리포니아는 산업과 IT로 유명한 곳이지 사회과학 분야인 법학이 꽃피는 곳은 아니다.
경력을 살펴보면 학생 시절 해리스는 정치에 큰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검사가 되면서 흑인 정치 공동체의 주목을 받았고, 그 내부에서 "이 사람이 괜찮으니 좀 만들어보자"는 뜻이 뒤늦게 모아졌던 것 같다. 바이든의 부통령 지명도 흑인 정치 공동체의 요구가 반영된 걸로 알고 있다.
4. 토론을 좀더 했어야
해리스는 정말 토론을 잘 했다. 해리스 앞에서 트럼프는 늙어 보였다. 똑똑한 젊은 여성 앞에서 징징대는 늙다리처럼 보였다. 트럼프는 그걸 알고 피했다. 해리스는 트럼프를 좀더 잡고 늘어졌어야 했다. 아 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안 물테니까.
트럼프가 안 나온다면 해리스는 본인이 빛날 수 있는, 토론처럼 보이는 장을 몇 번 마련했어야 했다. 그게 잘 안 됐다. 이건 내가 보기에 경력과 네트워크가 짧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5. 이스라엘과 가자
나는 해리스가 무서운 기세를 보였지만 선거 후반에 트럼프가 한 번은 치고 올라올 거라고 보았다. 원래 선거란 게 그렇다. 그걸 어떻게 다시 제압하느냐가 문제다. 그런데 해리스가 그걸 못 했다. 분석가들도 궁금해했다. 왜 해리스가 언론 노출을 줄이는지 알 수 없다고.
이건 나만의 추측이지만 가자 문제가 민주당 내에서 해리스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해리스는 언론에 가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한 번 밝혔었다. 가자와 하마스는 다르고, 네타냐후도 그만해야 한다고. 그 이후로 해리스의 언론 노출이 줄었다.
미국 민주당 내에 가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비교적 젊은 세대(60대부터)는 가자에 동정적이다. 그리고 언론이 주목하지 않아서 그렇지 네타냐후의 독재는 지금 러시아나 중국 못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 미국 민주당 주류가 눈을 감고 있다.
만약 미국 민주당 주류가 해리스가 당선되어 가자를 정리하는 것보다 트럼프가 네타냐후를 내버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면 어떨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부분이 정말 문제였다면, 해리스는 당 내부부터 정리해야 한다.
6. 어쨌든 해리스 정치 경력은 이제 시작
누구나 알듯이 미국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매우 다르다. 부통령은 상징적인 지위이고, 대통령 약점의 보완재 정도이다. 어쨌거나 바이든이 트럼프를 눌렀기에 누구나 현직 프리미엄을 끼고 다시 재선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경제 수치도 매우 좋았다. 그렇기에 해리스는 대통령 후보직을 별로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번 대선을 내다보면서.
덧붙여서 나는 시간이 없던 해리스가 민주당을 속속들이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혹도 있다. 민주당과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도 생각보다 훨씬 덜 나섰다. 여기에는 가자 문제와 아울러, 해리스의 정치 기반이 아직은 흑인 정치 공동체의 경계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뜻도 있다. (막판 지지 선언한 래퍼 카디비도 흑인 여성인데 그의 평소 공연 모습이나 노래 가사를 생각하면 얼마나 선거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해리스는 이번에 매우 좋은 기회를 잡았다. 비백인 여성일뿐만 아니라 하버드나 예일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대통령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일종의 아우라를 확보했다. 이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해리스는 트럼프와 유일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지구상에 단 한 명이다. 다음 번 대선은 불과 4년 남았다. 앞으로가 흥미롭다.
덧붙임 1 : 뉴스를 통해 접한 어떤 분석은 트럼프 캠프에 최고의 선거 전문가가 있었고, 해리스 캠프의 캠페인이 질이 떨어졌다고 한다. 절반은 틀린 말이다. 최고의 선거 전문가는 먼저 이길 후보부터 고른다. 그렇지만 해리스 캠프 캠페인이 별로였다는 건 사실이다. 바이든과 자신을 차별화하지 않은 것도 실수다(이것 역시 급작스런 후보 교체와 차별화로 인한 당내 분열 우려와 관련 있을 것이다).
덧붙임 2 : 어쨌거나 해리스가 남성 유권자의 호감을 덜 얻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난 사실 그집 남편이 좀 돌아다니면서 화제를 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하나의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