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어려워,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어. 사실 노벨문학상 전에도 후에도 들은 얘기다. 그렇지만 전문가 입장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독해하기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사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통념보다 쉽게 써야 한다.
<채식주의자>의 장점은 일단 간단하다는 데 있다. 주인공 영혜는 처음에 육식을 거부하고 나중에는 식사 그 자체를 거부한다. 그 과정에서 영혜의 가족은 완전히 붕괴된다. '가족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이야기다.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개인적으로는 매우 재미있었지만 지금 한국사회에 나오기는 좀 극단적이지 않나 싶었다(2007년에 출간). 내 예상은 빗나갔는데,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자기파괴나 형부와 처제의 섹스 같은 건 한국에서 별로 극단적인 게 아닌 거였다…
어쨌든, <채식주의자>가 어렵다는 반응은 이 극단적인 설정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거냐는 것일 게다(평범한 일반 독자 입장에서). 확실히 작품의 전개는 일반 윤리에 벗어난다. 오히려 억지로 밥을 먹이려는 영혜의 부모가 윤리적 기준에 가깝다. 자식을 살려야 하니까. 영혜의 남편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냥 좀 둔감하고 평범한 보통 한국 남자에 불과하다. 이 소설에는 알기 쉬운 선악 구별이란 게 없다. 그런 관점으로 들어가면 어려운 텍스트다. 그렇지만 파괴라는 기준으로 보면 <채식주의자>는 읽기에 쉬운 작품이 된다.
이 작품에서 제일 불편한 대목으로 지적되는 부분은 영혜 아버지가 억지로 탕수육을 먹이려는 장면이다(왜 탕수육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가족들도 열심히 팔을 걷어붙이고 영혜 아버지를 돕는다! 문제는 영혜 아버지가 이런 잔혹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다름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다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사랑해서 억지로 먹인다. 억지로 먹여도 된다. 사랑하기에 이러한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한국 사회에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문화가 발견된다. 한국에는 엄밀히 말해 관계라는 게 없다. 관계란 근본적으로 따지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관계는 의미가 매우 광범위하고, 반드시 부가되는 설명이 필요하다. 뒤집으면 그 설명의 괄호 속에는 무엇이든 쓰여질 수 있다. (사랑하는) 관계, (우호적인) 관계 등등. 관계란 직접 땅을 고르고 설계를 하는 집짓기에 가깝다. 관계를 갖기로 결정한 2인 이상의 사람들이 관계의 모든 요소에 대해 일일이 대화하고 토론하며 하나씩 결정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한국에는 이 관계라는 것이 없다.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바로 서열이다. 서열에는 설명이나 괄호가 없다. 서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모 자식이다. 부모 자식이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뒤집히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서열은 아파트와 비슷하다. 누가 들어가 살든 동일한 생활구조가 이미 셋팅되어 있다. 그 아파트가 미리 만들어 놓은 생활 스타일을 거부할 여지가 거의 없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 친인척, 상사, 부하, 동기 등등의 ‘아파트‘에 들어가는 순간 언어와 행동양식이 그대로 정해져 버린다. 개개인의 취향이나 이념은 거의 반영될 여지가 없다. 늘 설명해야 하는 괄호가 존재하는 관계와는 다르다.
문제는 한국 문화란, 사회의 서열에 폭력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사회는 부모는 자식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손윗사람은 손아래사람에게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문화적 합의가 있다. 물론 아랫사람이라고 늘 당하는 게 아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손아래사람은 손윗사람에게 부당한 요구를 ’가족이라면, 윗사람이라면 내게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것들‘로 포장하여 들이밀 수 있다. 그러한 요구에 고통당하는 쪽은 결국 ‘착한 사람’이다.
영혜 아버지가 억지로 탕수육을 먹이는 장면에는 이러한 한국 사회 특유의, 폭력이 내재된 서열이 반영되어 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러한 생각에는 개개인 차원의 어떠한 반성이 없다. 사랑하니까 이러한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살려야 한다는 ‘명분이자 도리‘가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파괴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형부와의 불륜은 흔들리는 가족 서열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한 장치다. 난 사실 이 소설에서 채식이나 식물이라는 메타포는 맥거핀이라고 생각한다. 채식이고 불륜이고 다 핑계고 서열을 철저히 파괴하기 위한 폭탄에 불과하다.
사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영혜가 제일 무서웠다. 나는 ’영혜가 채식을 하면서 점점 식사를 안 한다‘는 식의 표현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영혜는 자기 자신을 먹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영혜는 인류가 오래 전에 금기로 합의했던 것을 먹고 있다. 모든 육식의 출발점이자 잊혀진 근본. 그렇다. 영혜는 인육을 먹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먹어치우고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와 가족을 이루는 근본적인 뼈대, 즉 '서열'은 영원히 묻힌다.
<채식주의자>는 출간되고 2년 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소설을 거의 그대로 옮긴 걸로 알고 있다. 영화로 다시 만든다면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진짜 목적을 이미지로 만들야 할 것이다. 그래야 원작이 갖고 있는, 채식이나 페미니즘 뒤에 숨겨둔 의도가 드러날 수 있다. 영혜의 꿈대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는’ 이미지라면 바디 호러가 걸맞다. 우리 모두 누구를 죽여야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혜야 난 네가 제일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