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가 싫어서는 절대 아니고요
한때 알싸한 마라탕 맛에 빠져 주 2회 이상 마라탕 집을 찾았다. 그때 손님 대부분이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라는 점을 깨닫고 놀란 적이 있다. 마라탕은 맵기도 하지만 이국적인 향 때문에 입문이 쉬운 음식은 아니다. 어른도 못 먹는 사람이 있는데 마라탕을 한 그릇씩 앞에 두고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아이들을 보니 귀엽고 신기했다.
그 뒤로 중고등학교 주변을 걷다 보면 마라탕 집이 꼭 눈에 띄었다. 요즘은 학생들 사이에서 마라탕이 떡볶이를 대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학창 시절, 하교 후 떡볶이집 등교(?)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앞 골목에는 떡볶이집 삼십여 개가 줄지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떡세권’이었다. 근처 남고생들은 ‘OO여고 애들 교복에서는 떡볶이 냄새가 난다’며, 우리가 지나가면 코를 잡기도 했다. 아무렴 어떠랴, 요즘 아이들에게 마라탕이 그러하듯 하교 후 먹는 달착지근하고 쫄깃한 떡볶이는 학업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낙이었다.
여고 앞 떡볶이집이 경쟁이 심해지자 분식집마다 차별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떤 집은 짜장과 카레떡볶이를 메뉴에 추가했고, 또 다른 집은 갓 튀겨낸 바삭한 튀김에 주력했다. 그중에서도 즉석떡볶이를 전면에 내세운 ‘해피하우스’는 줄을 서야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부르스타 위에 올린 납작한 전골냄비 속에는 야들야들한 밀 떡볶이가 들어있다. 센 불에 파르르 끓여서 떡 먼저 건져 먹고, 튀김 기름이 녹진하게 우러난 고추장 양념에 김과 참기름을 뿌려 밥까지 야무지게 볶아먹었다. 날로 늘어나는 뱃살을 부여잡고 후회했다가도 ‘어차피 대학 가면 다 빠질 텐데 뭐’하며 간단히 무마했다.
인기 있는 맛집이 그렇듯 해피하우스도 규모가 작아 대여섯 테이블이 전부였다. 좁은 내부가 답답해 보이지 않게 벽 사방에는 거울이 붙어있었다. 거울 덕분에 실내에는 수십 명이 모여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생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달큰한 떡볶이 냄새가 공간을 점유했고(남고생들의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여고생들의 떠들썩한 수다 소리로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그날도 수업 끝나고 단짝 친구 둘과 해피하우스로 향했다. 셋 다 교실에서는 조용했지만 결코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매일 봐도 어쩜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수다를 떨다 보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해피하우스 앞에는 이미 먼저 온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30분 가까이 밖에 서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자리가 났다. 벌써 군침이 돌았다. 그런데 싱글벙글 웃고 있던 나의 얼굴은 분식점 안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굳어지고 말았다.
“미안한데 오늘은 너희끼리 먹을래?”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왜 그래 선영아.”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온 J와 H는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개미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얼굴이 너무 빨개서...”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떡볶이집 벽면 거울에는 온통 얼굴이 하얀 소녀들이 웃으며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풍선처럼 부어 있는 내 얼굴은 유독 눈에 띄었고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보였다. 내가 그들 속에 섞여도 괜찮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릴 적, 팔이나 목처럼 접히는 부위에 조금씩 흔적만 있던 아토피 증상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심해졌다. 월경주기에 따라 증상이 달랐다. 어떤 날은 파충류의 허물 같은 각질이 입 주변에 너덜너덜 붙어있었고, 어떤 날은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홍시처럼 붉었다. 심할 때는 목을 돌릴 때도 진물 난 피부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날은 얼굴이 빨간 날이었다. 얼굴 피부가 조이고 쓰라리긴 했지만 그 지경일 줄은 몰랐다. 아토피가 심해진 뒤로 집에서는 웬만해서 거울을 보지 않고, 등도 잘 켜지 않았다. 환한 조명을 밝힌 해피하우스의 거울이 적나라하게 나를 비추며 ‘그 얼굴로 지금 떡볶이를 먹겠다고?’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토피에 자극적인 음식이 좋을 리 없다. 매운 떡볶이에 기름진 튀김을 먹고 나면 필시 긁느라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일 테고, 잠을 설치면 다음 날 상태가 더 나빠질 것이 뻔하다. 알지만 참기 힘들었다. 하교 후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누리는 그 시간은 그 시절 행복의 전부라고 할 만큼 달콤했다. 맛있는 떡볶이와 단짝 친구 없이 지난한 수험생 생활을 어떻게 버티겠는가.
아픈 몸 때문에 나는 또래들이 누리는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늘 욕망과 싸우며 자제해야 했고 ‘왜 나만 이럴까’라는 억울함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부모님 모두 피부가 매끈하고 좋았다. 심지어 남동생은 사계절 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언제나 하얗고 보송보송했다. 하루종일 몸을 벅벅 긁어대던 나는 집안에서도 돌연변이였고 골칫덩이였다.
유전이 아니라면 이 병의 원인이 나한테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유독 몸에 해로운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그것을 절제하지 못한 죄. 피곤하다는 이유로 늘 늦잠을 자고 몸을 덜 움직인 죄. 과민한 신경으로 짜증을 잘 내고 소리를 지르며 우는 등, 엄마의 말대로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이런 난치병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엄마는 20년 넘게 아토피 각질로 지저분해진 딸의 방을 매일 청소하고 긁어서 피가 묻은 이불을 빨며 고생한 사람이다).
고3이 되면서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나는 어깨에 담이 올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점점 소심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다. 그 당시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아, 옛날 사람!). 교련 담당은 학생주임을 하는 할머니 선생이었는데 발소리만 들려도 모여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흩어질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어느 날 교련 선생은 수업 중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얘, 너는 술 마셨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갛니?”하면서 자기 딴에는 굉장히 재치가 있다는 식으로 농을 쳤다. 반 아이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고 나는 쉬는 시간 내내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졸업식 날, 나는 교련 교과서를 박박 찢어서 교무실 앞에 던져버리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
열아홉의 나는 진지하게 이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신이 나에게 전지현의 이목구비와 몸매, 피부 중에 딱 하나만 갖게 해 준다고 하면 무엇을 선택할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매끈한 피부를 달라고 할 것이다. 붉고 거칠고 따갑거나 가렵지 않은, 더울 때는 자연스레 땀이 배출되고 로션을 바르면 촉촉해지는, 남들처럼 평범한 피부를 한 번만 가져보는 것. 그것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 사항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때는 내가 이렇게까지 오래 고생할 줄 몰랐지만 말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 인생을 바꾸는 법!
저는 아토피, 허리디스크, 기능성소화장애, 편두통,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지만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내 인생은 짱짱합니다. '긍정의 기운'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거진 구독하시고, 매주 목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