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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Oct 04. 2023

맨날 아픈 사람도 결혼할 수 있을까

연하남과의 최후


이곳저곳 아픈 구석이 많은 나였지만 평범한 삶, 이를테면 연애나 결혼을 못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해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나도 남들과 비슷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겠거니 생각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친구 소개로 만난 J가 나와 사귀고 싶다고 고백했던 날,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J는 모델처럼 훤칠한 키에 눈웃음이 매력적인 연하남이었다. 다정한 말투를 쓰고 매너까지 훌륭한, 어디에 가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남자친구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지 않을까. 밤샘 업무를 하고 나서 얼굴에 아토피로 각질이 더덕더덕 올라왔을 때 나는 데이트를 취소하려고 했다. 내가 봐도 지저분하고 흉측한데 남자친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데 자꾸만 물어봐서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따뜻한 말로 나를 위로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온통 얼굴이 여드름 범벅이었어. 시간 지나니까 저절로 낫더라.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오늘 내 얼굴 보면 기분 좋아질걸?”     


예상치 못한 어른스러운 다독임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아픈 게 죄도 아니고 아토피가 있다는 걸 모르고 만난 사이도 아니었다. 내 모든 걸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든든했다. 그의 말대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우울했던 기분도 좋아지니 몸도 더 건강해질 것 같았다.     


사이좋은 우리를 질투라도 하는 듯 내 몸은 갑자기 한 번씩 고장이 났다. 모처럼 날씨가 맑아서 놀러 가려고 만났는데 급성 위경련이 왔다. 나는 괜찮다고 박박 우기며 버스를 타러 가자고 했지만 J는 응급실로 나를 데려다주고 옆을 지켰다. 아플 때마다 약과 죽을 사 들고 집 앞으로 찾아왔다. 1년을 만나면서 그 흔한 다툼 한번 없었으니 드디어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우리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J가 먼 지역으로 이사 가게 된 것이다. 장거리 연애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안정적인 관계에 특별히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 간 지 한 달 정도 지나자 연락이 뜸해졌다. 종일 연락이 안 되는 날도 생겼다. 불안해진 나는 서운함을 토로했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바빴다는 말만 반복했다.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이게 무슨 연인이야? 이럴 거면 헤어지는 게 낫지” 격앙된 나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독수리 같이 잽싼 반응 속도였다. 기다렸다는 듯 청산유수로 이별을 고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웠고 우리 추억은 잊지 않을게.” 그러더니 갑자기 30년 베테랑 연기자처럼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얼떨떨한 나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는 그의 사회자 같은 질문에 어이가 없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길 기다렸구나, 저는 혼자서 이미 마음을 다 정리했네.’ 나는 비겁하고 가증스러운 그에게 참기 힘든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사귀는 내내 나에게 그 어떤 불평도 한 적 없었다. 단지 사는 곳이 멀어졌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변심할까. 젊은 연인의 이별이란 무엇인가. 울며불며 붙었다가 헤어졌다가를 반복하다가 오만정이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겨우 남남이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한 번에 헤어진다고?     


생일 케이크 위 촛불이 꺼지듯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나는 몸살이 심하게 났다. 남자가 아니라 인류에 신뢰를 잃은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점은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사귀는 동안 특별한 갈등이 없었기에 그가 새로운 지역에서 다른 여자를 만났을 거란 강한 의심이 들었다. 차라리 확인 사살을 하자는 심정이 들었다.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문자를 보냈다. 이별 이유를 솔직하게 알려달라고. 그에게 답장이 왔다. 구구절절한 변명 뒤 내 눈에 들어온 마지막 문장.     


너는 나이도 있고
결혼할 사람 만나야 하는데
내가 놓아주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어.
솔직히 네 건강도 마음에 걸렸고...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내 건강을 늘 염려해 주고 병원에 함께 가고 약을 챙겨주던 사람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결혼이 부담스러운 연상녀에 비실비실한 나의 건강 ‘스펙’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은 역시 부모님뿐인가. 배신감은 자책으로 이어졌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면 안 됐다. 아토피가 심했을 때는 집에서 나가지 말고 꼭꼭 숨어있어야 했다. 갑자기 위경련이나 두통이 생겨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숨겨야 했다. 괜찮다는 말, 그래도 내 눈에 예쁘기만 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나는 왜 이리 순진하고 멍청했을까.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니 한편으로는 그가 이해되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젊고 건강하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본능이다. 매일 몸 한 구석이 아픈 사람과 굳이 함께하며 스스로 짐을 짊어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연애를 못 할지도 모르겠다, 나와 결혼까지 결심하는 상대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 같았다.      


죽어버린 듯한 나무에도 봄이 오면 새순이 돋듯,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던 나는 시간이 흘러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사랑은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상처는 아물다가 다시 벗겨졌고, 새살이 올라오면서 흉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절대로 연하를 만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무너뜨렸다. 아뿔싸. 또 연하를 만나다니! 나는 그때보다 한층 더 늙었고 여전히 아토피로 피부가 거칠었으며 이유 없이 배와 머리가 자주 아팠다.     


신경을 쓴다고 해도 그와 데이트를 하고 나면 나의 흔적이 남았다. 자동차 보조석 까만 시트에 허옇게 각질이 떨어진 것이다. 긁지 않아도, 조금만 움직여도 두피와 목덜미에서 떨어지는 각질까지 내가 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 문을 열고 민망해하며 좌석을 털어내는 내게 그는 자기 눈에는 '선영 부스러기'도 귀여우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익살을 부렸다. 나는 '집에 가서 나를 잊을까 봐 일부러 남겼다'라며 뻔뻔하게 굴었다. 둘 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그럼에도 ‘괜찮다, 예쁘다’라는 그 말이 거짓일지 모른다고 순간순간 의심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해도 괜찮을까, 눈치가 보였다. 연상인 내가 이제 막 취업한 그에게 부담이 될까 봐 결혼에는 관심 없는 척했다. 나 같이 맨날 아픈 사람이 건강하고 앞날이 유망한 사람과 결혼까지 꿈꿔도 되는 것일까. 악몽이 반복될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어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1년 후 결혼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 행운을 놓치지 않고자 나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행동했다. 불안한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면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의 조언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내 불안과 근심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몸이 아파도, 부족한 면이 있어도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몸은 물러도 마음은 단단하니까, 마음이 무른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나의 부족함을 미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돌보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주 못할 바도 아니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 인생을 바꾸는 법!


저는 아토피, 허리디스크, 기능성소화장애, 편두통,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지만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내 인생은 짱짱합니다. '긍정의 기운'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거진 구독하시고, 매주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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