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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Mar 11. 2024

슬픈 영화는 보지 않는 마음

아는 맛보다 무서운


2023년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날 눈물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해를 맞이하기 하루 전날, 시누의 생일 파티 겸 시가 식구와 모였다. 해산물 뷔페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 케이크 촛불까지 불고 나니 이제 할 일이 없었다. 날이 좋으면 볕 아래에서 산책을 하거나 차를 타고 놀러 갈 텐데, 흐리고 추웠고 연말이니 차가 막힐 것이 뻔했다.


P형 인간 - 나와 남편, 시누는 머리를 싸매고 이제부터 무얼 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 하는 누군가의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가족영화를 함께 관람하며 훈훈한 마무리를 하면 좋겠다 싶었다.


아쉽게도 근처 극장에 시간대가 맞는 개봉 영화가 거의 없어서  <노량>과 <3일의 휴가> 중에서 골라야 했다. 나는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김해숙과 신민아가 모녀 사이로 출연하는 <3일의 휴가>를 절대적으로 피하기 위해 '노량이 훨씬 재밌겠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다. 하지만 시누는 <3일의 휴가> 끌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시간대가 애매하지 않아요?", "김해숙이랑 신민아, 뭔가 안 어울리는데" 하면서 관심을 돌리려 했지만, 다수결로 <3일의 휴가> 결정되었다.


나는 김해숙 배우를 좋아한다. 신민아 배우도 나쁘지 않다. 전쟁 영화보다 드라마 장르가 어르신과 보기에도 편하다. 그럼에도 그 영화를 꼭 피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목놓아 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하게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면 마음이 쉽게 물러진다. 조금만 슬픈 기분이 들면 금세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사연 있는 사람처럼 운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겨울왕국>, <엘리멘탈>을 볼 때도 당연히 울었고, 예전에 '유퀴즈온더블록' 같은 프로그램도 보기 힘들어했다. 특히 고생을 많이 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내가 신기한지, TV를 보다가 조금 슬픈 장면이 나오면 남편은 고개를 들이밀어 내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나는 숨죽여 울고 있었고,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이구 슬퍼쩌여" 하면서 놀려댔다.


눈물 제어가 안 되는데, 돌아가신 엄마가 딸을 찾아와 3일 동안 행복한 휴가를 보낸다는 설정의 영화를 어찌 보나. 예고도 벌써 눈물샘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나 녀석에게 경고했다. '분명 울게 될 거야, 각오해라.'


도살장 끌려가듯 영화관에 들어가 착석한 나는 어딘지 허전했다. 아이고, 휴지를 챙기는 걸 깜박한 것. 정확히 영화 시작 10분 만에 수도꼭지가 열렸고 1시간 40분 내내 눈에서 나오는 물은 멈추지 않았다. 국민 엄마 김해숙이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방을 걸레질하는 장면만 봐도, 딸에게 호통치는 장면만 봐도 가슴이 저미어 눈물이 났다. 이 글을 쓰는데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비교하자면, 대파 한 단을 써는 것처럼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성긴 니트를 입고 가서 소매로 눈물을 훔치자 얼굴이 쓰라렸다. 결국 눈물 닦기를 포기하고 양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끈끈한 콧물도 흘렀다. 눈물은 무릎 위로 툭 소리를 내며 계속 떨어졌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느라 턱관절이 아팠다. 그런데 옆 블록 좌석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시어머니일 것이다. 나못지 않은 울보시니까.


드디어 고문 같았던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졌다. 내 바로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육성으로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에 말에 따르면 눈물과 콧물이 온통 뒤범벅되어 일그러진 내 얼굴이 누군가에게 얻어터져서 피범벅이 된 모습처럼 보였다고 한다. 누가 보면 장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줄 알겠다며. 상영관 출구에서 만난 시어머니 역시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방실방실 웃는 시누와 남편을 뒤로 나와 시어머니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이상하다. 한 때는 슬픔을 즐기기도 했는데. 발라드를 주야장천 들으면서 일부러 눈물을 쥐어짜던 때도 있던 것이다. 특히 이십 대 시절, 남자친구와 이별을 한 후에는 음울한 노래만 일부러 골라 들으며 지하 깊은, 맨틀까지 감정의 골짜기 파고들어 가 즙을 짜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하고 정화된 듯 개운한 기분도 들었다. 나중에는 그 느낌을 즐겨서 일부러 슬픈 감성의 음악을 찾아들었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턴가 슬픔을 주저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예 회피하고 있다. 뭔가 슬플 거 같으면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자리를 뜬다. 슬픈 영화, 슬픈 음악은 절대 보지도 듣지 않는다. 남편이 발라드 감성의 음악을 틀면, '텐션 떨어지게 뭐 이런 걸 들어?' 하면서 신나는 음악으로 바꿔 틀었다.


왜 이렇게 슬픔을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슬퍼서, 그래서 눈물까지 흘리고 나면 나는 지쳐버리고 만다. 체력 소진이 너무 크다. 그 감정을 다시 추슬러서 평온의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한참이나 걸리고('3일의 휴가'를 보고 이틀 동안 힘들었다) 에너지 소모가 크다 보니 슬퍼지려고 하는 기색이 보이기만 하면 그것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것 같다. 결론은 체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는 맛이 무섭다는데, 난 아는 슬픔이 두렵다. 인생은 희로애락의 비빔밥.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더욱 소중한 것을 안다.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 덕택에 훌륭한 예술이 꽃피울 수 있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어차피 살면서 시시때때로 슬픔을 겪을 텐데, 피해 갈 수 없을 텐데 최대한 적게 울고 많이 웃고 싶은 마음은 욕심인 걸까. 모르는 슬픔은 어쩌지 못해도 아는 슬픔인데 좀 피하면 어떤가.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스쾃 하나라도 더하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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