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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모습을 결정할 권리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과 죽음의 순간에 구현되어야 하는 궁극적 가치


나의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멋을 부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외할머니는 여자는 피부가 고와야 한다며 종종 우유로 목욕을 하셨고, 언제나 드라이로 정성스럽게 머리의 뽕을 세우셨다. 겨울이 되면 윤이 나는 모피코트를 꺼내 입으셨다. 수다가 많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셨으며, 사람들과 약속도 많았다. 기차, 버스, 지하철을 갈아타며 서울 이모네를, 창원 우리집을, 대구 형제들 집을, 분주히 다니셨다. 외할머니는 화사한 유채색이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외할머니가 좋았다. 

  그런데 외할머니의 큰 아들인 외삼촌이 먼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의 에너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외삼촌이 남긴 유족연금을 받아, 처음 얼마간은 목주름 시술도 받으시고, 백화점 노래 교실도 다니시며 예전과 다름없이 사시는 듯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 진단을 받았다. 외할머니는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는 할머니 앞에서 늘 내 소개를 해야만 했다. 외할머니의 멋 부리는 시간도 끝이 났다. 드라이로 힘을 잔뜩 준 머리 뽕도 사라졌고, 머리는 고무줄로 질끈 묶여졌다. 

  지금 외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있다. 시간이 갈수록 외할머니의 치매는 심해진다. 외할머니는 짧거나 긴 탄식을 내뱉을 뿐, '언어'의 형태로 된 음성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급기야 입 속에 있는 음식을 씹는 행위 자체도 잊어버리게 되셨다. 그러자 의사는 씹지 않아도 영양분이 자동으로 장기로 보내지도록 몸에 관을 삽입했다. 그리고 남자아이처럼 머리가 짧아졌다. 유채색의 우리 할머니는 과거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들로 둘러싸인 삶에 대해 상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나 속수무책으로 허약하다는 사실이 슬프고, 의학이 발달할수록 이런 일들이 더욱더 우리에게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공포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나는 종종 내가 희망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모두가 바라듯이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어느날 밤에 잠이 들어 고통없이 죽는 것이 일순위이다. 이것이 안 된다면, 더 이상 몸이 버틸 수 없다고 생각이 들면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고 싶다. 가장 바라지 않는 죽음은 오랜 시간 나을 수 없는 병으로 심한 고통만을 받거나,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살아있는 기쁨과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로 시간만 보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에는 난관이 있다.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결정은, 거의 필연적으로 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않는 상황을 선택하는 것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족이나 의사 등 제3자가 타인의 치료 거부 행동에 관여할 때는, 선의에 기했을 때조차도, 죄책감에서 자유롭지가 않을 것이다. 의술의 눈부신 발달로 오로지 연명만을 위한 시간이 한정없게 되자, 점점 이러한 선택이 맞는지에 대해 어두운 회의가 쌓이게 된 것이다. 외할머니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외할머니 본인도 아니고, 심지어 자식도 아니고, 그저 여러 손주 중 한명에 불과한 내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권한을 넘는 일이고, 불경스럽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내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외할머니의 행복을 비는 마음뿐이다. 생명권이라는 헌법 가치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전통을, 마음에 새기며, 이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끊어낸다. 게다가 우리 외할머니는 치매가 심한 것일뿐,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거나 연명치료를 하시는 것도 아니니까. 


<보라매병원 사건>


  90년대 후반에는 치료 중단을 한 의사에 대해 살인방조죄가 선고된 일이 있었다. 1997년 12월 한 남성이 경막외출혈상을 입어 보라매병원으로 응급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그는 수술이 잘 끝나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남성은 인공호흡기 없이는 호흡을 할 수가 없었고, 추가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남성의 아내는 병원에 남편을 퇴원시키겠다고 했다. 의사들은 퇴원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고 설명하며, 치료비가 부담이 되면 1주일 정도만 기다렸다가 남편이 안정이 되면 도망가라고까지 이야기했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판결문에 의하면, 남성은 사업에 실패한 후 17년 동안 무위도식하면서 술만 마시고 가족들에 대한 구타를 일삼아 왔다고 한다. 결국 의사들은 남편이 사망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아내로부터 받고 남성을 퇴원시켰다. 남성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지 불과 5분 만에 사망했다. 

  이후 남성의 형제가 남성의 아내와 의사들을 살인죄로 고소하여, 법원은 아내에게는 살인죄를, 의사들에게는 살인방조죄를 선고하였다. 생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치료를 중단하여 사망시켰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치료를 강경하게 반대하여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설명과 회유를 한 후에 퇴원을 시켰던 이 사건 의사들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판결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된다면, 향후 의사들은 퇴원하면 죽을 것이 뻔한 환자이더라도 환자나 환자 가족이 치료비가 없어서 퇴원을 원하면, 적어도 법적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이 퇴원을 시켜줄 수 있게 될 것이니, 법원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언제나 제일 중요한 것으로 취급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결은 사실상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조차도 병원이 거부하는 효과를 낳았다. 혹시라도 회복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법정에서 살인(방조)죄의 위험이 있으니, 의사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김할머니 사건>


  그러나 10년 후 이러한 병원의 태도를 바꿔줄 '김할머니 사건'이 등장한다. 김할머니의 남편은 오래 병상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 남편의 모습을 보아온 김할머니는 평소 가족들에게 '나는 생명만 연장하는 의미없는 치료는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김할머니가 폐종양 조직 검사를 받던 중 과다출혈 등으로 심정지가 발생하여 저산소성 뇌손상을 입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김할머니는 이때부터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으며,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상태로 항생제 투여, 인공영양 공급, 수액 공급 등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김할머니의 자녀들은 평소 어머니의 뜻대로 병원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하였으나, 역시나 병원은 거부하였다. 이에 김할머니와 자녀들에게 남은 해결책은 병원을 상대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여 달라는 소송뿐이었다. 김할머니 측은 이미 김할머니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건강이 나아질 수가 없고, 현재 병원의 치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하여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병원은 치료를 중단하면 김할머니가 사망하니, 본인들은 치료를 중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치료 거부를 원하는 김할머니의 손을 들어 주었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생명과 신체의 기능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운명결정권을 가진다'면서 '인간은 그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맞게 되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권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기는 하나 정상적으로 생존해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그 생을 다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과 죽음의 순간에도 구현되어야 하는 궁극적 가치이고, 특히 의학기술의 발달로 의료장치에 의한 생체기능의 유지 및 생명의 연장이 가능해진 오늘날에는 생명연장 치료가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식물상태로 의식 없이 생명을 연장하여야 하는 정신적 고통의 무의미한 연장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인격적 가치를 해할 수 있는바, 이와 같은 경우에는 환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더 부합하게 되어 죽음을 맞이할 이익이 생명을 유지할 이익보다 더 크게 된다고 할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생명 그 자체만은 아니며, 인간의 생명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서울고등법원 2009. 2. 10. 선고 2008나116869 판결 [무의미한연명치료장치제거등]).


  이 판결 이후로, 치료 효과 없이 환자의 생명만을 연장하기 위한 연명치료는 본인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생기기도 했다. 


죽음, 예민하지만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문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되도록 피하고 싶어한다. 1965년, 처칠 전 영국총리의 임종이 임박하자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에 처칠 장례식 조문 대표로 누구를 보낼지를 물었다. 당시 한국은 '미리 죽음을 예측하면 불길한 결과가 발생할지 모르니, 장례식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도 대다수 사람들은 부모에게 연명치료를 원하는지, 어떤 장례를 하고 싶은지에  물어보는 일을 꺼려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생의 마지막에 반드시 따라오는 '정해진 사건'이다. 그러니 삶을 살아내는 일은 결국 죽음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일도 포함하는 것이다. '김할머니'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찾은 그녀만의 답이 있었고, 어머니의 평소 뜻을 알았던 자식들에 의해서 생의 마지막 방식을 선택하고 죽음을 맞았다. 이것은 그녀가 마지막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나도 가족들과 각자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하여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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