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망인의 명예에 대한 권리

이휘소 박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

죽고 없는 사람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생기면 어떨까.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명예도 사라지는 걸까. 그러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니, 사람의 '이름'은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다. 법원의 생각도 같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요즘 세대에게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면 영화 <오징어 게임>이 연상될 것 같지만, 80년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는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당시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이 돌려볼 정도로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는 조회시간의 국기에 대한 경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용후가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아 조국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핵무기로 한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을 항복시키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당시 우리들이 이 소설에 더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이 바로 세계적인 한국의 물리학자 이용후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서문에는 '개인의 최고 명예랄 수 있는 노벨상마저 포기하고 조국의 핵개발을 위해 죽음도 각오한 채 귀국했던 천재 물리학자", "이미 죽음을 예견한 채 모든 영화를 버리고 조국으로 달려와 핵개발을 완료하려 했던 이휘소"라고 적혀있었다. 조국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 과학자가 우리나라에 있다니, 우리들의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이휘소 유족들이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발행, 판매 등을 금지시켜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었다는 사실은 변호사가 된 이후에 알게 되었다. 실제로 이휘소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어서, 유신체계가 굳혀지면서 한국과 관련된 학술 운동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조국을 위해 핵개발을 개발한 적도 당연히 없었다. 이에 유족들은 책이 이휘소의 명예와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이 이휘소의 실제 생애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소설 서문의 작가의 말("개인의 최고 명예랄 수 있는 노벨상마저 포기하고 조국의 핵개발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채 귀국했던 천재 물리학자"와 "그들과는 딴판으로 이미 죽음을 예견한 채 모든 영화를 버리고 조국으로 달려와 핵개발을 완료하려 했던 이휘소")을 삭제해야만 발행, 출판 등이 가능하다고 판시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94카합9230).


  이와 관련한 법원의 판시는 아래와 같다.

"소설의 서문에서 소설의 모델이 된 인물을 밝히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 부분까지 소설의 구성부분이 된다고 볼 수는 없고, 최소한 서문에서는 소설의 모델이 된 인물에 관하여 기술하면서 실제와 달리 표현하여서는 안 되는바,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서문 '작가의 말'에서 이휘소가 우리 나라의 핵개발에 관여한 것처럼 그의 삶을 실제와 현저하게 달리 묘사하였다면, 이휘소에 대한 명예훼손 또는 인격권 침해가 되고, 그가 사망하였다고 하더라도 유족이 그의 명예훼손 및 유족들의 경건 감정 침해를 이유로 그 부분의 삭제를 청구할 수 있다.
  인간은 적어도 사후(사후)에 명예를 중대하게 훼손시키는 왜곡으로부터 그의 생활상의 보호를 신뢰하고 그 기대하에 살 수 있는 경우에만, 살아있는 동안 헌법상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인간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그의 사후에도 그의 삶이 왜곡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와 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전체의 발행을 금지시켜달라는 유족의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소설 서문에 가장 문제되는 표현을 삭제하는 방법으로 고인의 인격권을 보호한 판결이다.*1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족이 영화상영을 금지해달라는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다. 이 영화는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10.26사건을 소재로 하는데, 유족의 주장은 이 영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고 죽음을 희화화했다는 것이었다. 배우 윤여정이 <그때 그 사람들>의 감독인 임상수에게 "너야 원래 미친 놈이니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쳐도 이런 영화를 하겠다고 받아주는 영화사가 어디 있겠느냐. 받아준 영화사에 감사해야 한다"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문제적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역시나 기대대로(?) 영화사는 소송에 휘말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으니, 결과적으로 영화사로서는 옥석을 가리는 선구안과 더불어 예술을 위한 헌신성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어쨌거나 소송 이야기로 돌아가서, 법원은 처음에는 영화 속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라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공방 끝에 영화사에게 유족에게 1억원을 배상하되, 장면의 삭제는 불필요하다고 판시했다.*2 


  상영금지 청구와 관련한 법원의 입장은 '영화 상영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므로,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 피해자에게 매우 중대한 손해를 입힐 우려가 있는 경우에 예외적으로만 영화상영금지나 제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로 인한 침해가 그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즉 영화로 인한 침해가 유족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할 정도는 맞는데, 영화 상영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판결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사자에 관한 사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된다  이므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학문적, 예술적 탐구와 표현은 그로 인한 가치가 이미 시간의 경과로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역사적 인물의 인격적 법익을 보호함으로써 달성되는 가치보다 소중한 것으로 배려되어야  이고,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경우에는 더욱  인물에 대한 탐구와 평가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이다.


  고인인 전직 대통령을 소재로 한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영화가 특정 장면을 통해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고인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등 고인의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였으나, 고인의 역사적 특수성, 위 영화가 다룬 사건의 역사적 특수성, 영화라는 표현물이 갖는 특수성, 위 영화의 특수성을 종합하여 볼 때, 위 영화로 인한 고인의 인격적 법익에 대한 침해가 영화상영 등을 금지해야 할 정도로 중대, 명백하지는 않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05가합16572판결)


  죽은 사람은 역사의 일부분이 된다. 죽은 사람의 서사 가운데 어떤 것은 고인의 명예와 직결되어 있다. 고인이 공인일수록, 고인의 행적이 역사적 가치를 가질수록, 고인의 삶은 현재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고인일수록 계속하여 학문의 관점에서 연구되고, 예술로 표현되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과정에서 고인은 생전보다 더 영예로워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또 어떨 땐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일을 맞닥뜨리는 것도 피할 수가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유족의 감정을 훼손시켰다. 고인의 명예는 역사와 예술이라는 가치 앞에서 한 발 물러나야 할 때가 있다. 



<신당역 살인사건>과 <정인이 사건> 


  최근에 고인의 인격권 문제를 떠올린 것은 신당역 지하철역에서 이십대 여성이 스토킹하던 남자에게 피습을 당해 숨졌다는 사건을 보면서였다. 이 사건을 보며, 2020년의 <정인이 사건>이 떠올랐다. <정인이 사건>은 양부모가 입양아인 정인이를 학대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두 개는 극악한 범죄로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내가 두 개 사건을 같이 떠올린 건 두 개 사건의 너무 다른 점 때문이었다. 왜 우리들은 신당역 살인사건의 피해자 얼굴은 모르는데, 정인이 얼굴은 잘 아는 걸까. 이 의문은 어느 기사에서 풀렸다. 신당역 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들은 피해자의 사진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부탁했다. 유족들은 피해자가 살인사건의 피해자로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정인이 사건을 보면, 정인이와 신당역 살인사건 피해자는 한 가지 점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정인이는 유일한 가족이 가해자인 양부모였으므로, 정인이를 위해 목소리를 내줄 유족이 결국 아무도 없는 셈이었다. 제일 처음 정인이 사진을 공개한 곳은 어느 국내 언론사였다. 과연 정인이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정인이의 얼굴 공개가 가능했을까. 더구나 맞아서 멍이 든 얼굴을 온 국민이  보도록 두는 것이 옳았을까.*3 물론 언론사는 정인이 사진이 보도가 되었기에 결국 사회적 관심이 이렇게나 커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당역 살인사건의 경우에 피해자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스토킹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정인이 사건도 좀 더 다르게 보도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고인의 명예 보호를 위해서 다툼도 불사해줄 유족이란 존재가 없으면 안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서글펐다.  



  이런 점에서 자칫 친일파로 매도될 뻔 했는데, 고손까지 나서서 소송을 하여준 덕분에 명예를 되찾은 민족대표 33인 소송이 생각난다. 몇 년 전, 한 역사 강사는 3.1운동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이 친일로 돌아섰다고 표현을 하여, 유족들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 판결문에는, 자, 손, 증손, 고손으로 내려갈 때마다 위자료 금액을 감액한 아래의 표가 실려 있었다. 정신적 위자료 산정에 대한 판사님의 고민과 고충이 진정 느껴지는 표가 아닐 수 없다.  

*이 표에서  w는 33인의 좌장격이던 손병희로, 강사의 강의에서 이름이 더 언급되어 위자료 금액을 더 높였다고 한다.  


  그러나 저러나, 자, 손, 증손, 고손까지 나서준 소송을 보며 민족대표 33인은 하늘에서 얼마나 듬직하고 뿌듯했을까. 공인도 아니고, 행적이랄 것도 없는 까닭에, 죽어서까지 나의 명예가 훼손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일은 모르니, 그저 아이들에게 잘해야겠다.



*1: 출판사가 가처분 결정에 따라 서문의 표현을 삭제하여 관련 본안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2: 1심에 대해 쌍방이 항소하였는데, 2심은 조정(당사자 간의 합의)으로 끝나, 종국적으로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3: 참고로 <나주초등생 성폭행 사건> 판결에서 '피해자 얼굴 상처 사진'은 사생활 영역 중에서도 가장 보호가치가 큰 비밀 영역에 속한다고 본바 있다. 법원은 성폭행 상처를 사회 일반에 공개하는 것은 어떠한 공익적인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3가합50737판결).

이전 09화 삶의 마지막 모습을 결정할 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