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반듯한 인상의 노신사가 얼굴처럼 얌전히 생긴 서류 봉투 하나를 손에 들고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 그분의 이야기는 이랬다. 자기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 채권자라며 노신사를 사기로 고소했고, 생각지도 못하게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고 했다. 항소심에서 고소인이 제출한 증거가 위조임이 밝혀졌고, 다행히 무죄 판결이 난 게 대여섯 달 전이란다.
노신사의 고민은, 그가 십오 년 전쯤에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유로 그가 휘말린 1, 2심 재판 결과가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고 포털에서도 이 보도들이 너무나 손쉽게 검색되는 것이었다. 노신사는 원기사 삭제까진 바라지 않는다면서, 주요 포털에서만이라도 검색이 되지 않게 할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친정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노신사 분이 열심히 살아왔을 지난날들을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형사 소송 관련 기사를 덮을 다른 좋고 멋진 뉴스거리가 그 분 인생에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흘러 그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후에도,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포털에서 손쉽게 노신사에 대해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노신사는 여기저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몹시 피로한 기색이었다.
경매 정보를 지우려고 한 스페인 변호사
모든 정보가 디지털로 기록되면서, 아날로그 시절 같으면 금방 잊혀질 보도들이 없어지지 않고 인터넷 세상에 늘 상시 대기하는 상태가 되었다. 클릭 한 번이면 언제든 쉽게 ‘재등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잊힐 권리'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곤잘레스는 '잊힐 권리'를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람이다. 곤잘레스는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 깜짝 놀랐다. 자신의 집이 12년 전에 경매로 넘어간 사실이 인터넷 일간지에 남아있고, 심지어 구글에서 위 기사가 검색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곤잘레스는 당장 신문사에 삭제를 요청하고, 구글에는 검색이 되지 않게 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은 결국 법원에 가게 되었다. 법원은 원래 기사 삭제까지는 불필요하지만, 구글에 대해서는 위 기사가 검색되는 링크를 삭제하라고 판단했다. 개인의 부채 정보는 잊힐 권리가 있다고 보아, 구글이 검색 결과에서 경매공고 기사를 제외하는 것이 맞다고 본 것이다.
곤잘레스 판결은 인터넷 상에 있는 개인의 정보나 사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 소위 '잊힐 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로 매우 유명하다. 그리하여 곤잘레스의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집이 경매로 넘어간 사실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잊힐 권리의 명과 암
인터넷이 없던 시절 정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수명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그야말로 정보는 영생을 얻게 되었다. 인터넷에 나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들이 떠돌아다니고, 누구나 그걸 검색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러니 이러한 끔찍함을 해결해줄 장치나 제도가 필요하다. '디질털장의사'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겨났는데, 이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인터넷에 있는 의뢰인에 대한 글과 사진을 삭제해주는 직업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보 대상자의 요청이 있다고 하더라도 잊힐 권리가 받아지지 않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정보가 '공인에 대한 기록'인 경우에는 역사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역사 기록물은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 고유의 가치를 갖는 경우가 많다. 또 '기사'에 대해 잊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 침해가 된다.
노신사는 대중들에게 엄청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고위 공무원이었던 사람이고, 더구나 노신사가 삭제하고 싶은 글은 모두 언론 기사였다. 잊힐 권리를 주장하기에 좀 맞지 않는 사건으로 보였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사무실을 나서는 노신사의 발걸음이 무겁고 쓸쓸했다. 노신사가 돌아간 후에도 며칠 동안 노신사의 축 쳐진 어깨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