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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24. 2021

엄마,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줘

엄마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줘   

  

엄마는 어린 나이에 내게는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를 여의었다. 이유까진 모르겠지만 외할머니는 아이 셋을 남기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재혼을 하시고 아이 세 명을 더 낳으셨다. 엄마는 여섯 남매 중 장녀이다. 


난 이 사실을 외사촌 언니로부터 스무 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외할머니와 통화할 때 늘 존댓말을 쓰는데 그 이유도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넷째 외삼촌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도. 다섯째, 여섯째 이모들은 왜 둘째 이모와는 달리 우리 집에 자주 오지 않는지, 엄마와 전화하는 횟수가 많지 않은지도. 

무엇보다 엄마의 유다른 자녀 사랑의 근원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우리네 형제들에게 집착을 하셨는지.      


엄마는 ‘선 넘기’가 특징이다.      


명절,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친정에 가면 내가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가도 엄마가 날 찾는 소리가 들린다. “하율아 어디 있니?” “화장실” 이렇게 크게 말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엄마가 직접 끓인 물을 무조건 마셔야 한다. 몸에 좋은 생강, 보리, 마, 말린 표고버섯 등등을 넣은 쌉싸래한 엄마 표 물을. 밥을 먹을 때에도 내 옆에 붙어 앉아 “이 반찬 좀 먹어봐.”하면서 내 밥에 반찬을 올려주신다. 밥을 먹자마자 이미 엄마가 까놓은 과일을 먹어야 한다. 이 모든 일에 쉴 틈이란 없다. 어떤 반찬을 먹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시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르다. 


밥을 먹고 나면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제 뭐할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엄마의 가장 큰 즐거움은 딸들과 같이 목욕탕에 가는 거다. 엄마에게 목욕이란 때를 미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목욕하고 나오면 얼마나 산뜻한지 아니?” 하고 목욕을 끝내면 꼭 전화를 하셔서 자랑하듯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지난 몇 십 년간 엄마는 주말마다 아빠와 동생과 함께 목욕을 다녀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엄마와 함께 탕에 몸을 담그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가서 무슨 음식 먹었니?”

명절 때마다 하시는 질문이다. 

“응, 시어머니가 닭볶음탕 해주시고 집에 가기 전에 고기 구워 먹었어.”

“고기? 삼겹살?”

“아니, 쫄대기 살이라고 하던데 정확히 어떤 부위인지는 몰라.”

엄마는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고기 구워 먹는 게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 아니? 고기 구우면서 발암 물질이 나온다고. 고기는 되도록 삶아 먹어야 해. 너네 시어머니는 뭘 모르신다.”

“얼마나 맛있는데.”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엄마의 호구 조사는 이제야 시작이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근황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신 후 형제로 넘어간다. 

“사위네 형 네 집은 몇 평이니?”

“나도 몰라.”

이래선 안 되는데 솔직히 귀찮다. 

다시 엄마의 질문이 이어진다. 

“그 사람은 월급이 어떻게 되니?”

나로서는 절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이다. 

갑자기 속에서 열이 확 올라온다. 

“엄마는 뭐 그런 게 다 궁금해?”

얼마간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해야지만 엄마는 질문을 멈춘다. 하지만 이건 중학교 때 엄마에게 당한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와 속옷을 들추고 생리대를 바르게 차고 자는지 검사까지 하던 분인데 뭐, 이쯤이야.


엄마는 이런 분이시다. 이런 분이 내 딩크족 선언에 얼마나 조바심이 나셨을까 하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처음에는 ‘신혼 끝나면 낳겠지.’하고 생각한 거 같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임신 소식이 없자 드디어 채근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도대체 언제 갖는 거니?”

자녀 계획이 없다는 내 말에 ‘우리 딸의 마음을 바꿔주소서.’ 하는 엄마의 간절한 새벽 기도 제목이 급히 추가되었다. 

“너는 낳기만 하면 내가 다 키워줄 텐데 왜 낳지를 않니?” 하는 하소연에 “난 아기 귀여운 것 하나도 모르겠어.” 하고 말하면 “네 애를 안 낳아 봐서 그래. 자기 아기를 낳으면 그 애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그냥 남의 애 쳐다보는 거 하곤 차원이 다르지.” 라는 말로 응수하셨다. 요지는 “얼른 애 낳아라.” 이다. 하지만 마흔이 가까워 와도 아이 낳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제는 거의 포기 단계에 이르신 거 같다.      


엄마의 질문이 달라졌다. 

“네 시동서 딸 말이야, 그 아이는 이제 몇 살이지?”

“다섯 살이야.”

“애는 이제 외할머니한테 안 맡기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키우니?”

“응.”

“애는 엄마, 아빠 닮아서 키가 작지?”

“아닌데, 시동서 나하고 키 비슷해.”

“내 기억에 네 시동서 키 무척 작았던 거 같은데.”

“엄마는 그런 게 궁금해?”

여지없이 살짝 짜증을 내야지만 엄마의 질문은 멈춘다. 

짜증을 내고 나면 여지없이 살짝 자책감이 든다.      


나는 왜 짜증을 내는가. 

어려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외롭게 큰 분에게. 

자식에 관한 거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궁금한 엄마에게.

몇 십년간 목욕을 다니면서도 돈 아까워 그 흔한 녹차 하나 사 드셔 본 적, 세신 한  받아 본 적 없으신 엄마에게. 

박봉의 공무원 월급에 애 넷을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며 한 생을 다 보낸 엄마에게. 


그러고도 지금 와서는 “너희가 다 축복이자 기쁨이었다.” 하는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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