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명 Jan 09. 2021

나 아이 낳았어!

나 아이 낳았어!     


그럴 줄 알았다. 딩크족을 선언한 나와 육아의 길을 선택한 내 대학 친구 사이가 예전과 같지 않을 줄은. 하지만 내가 그런 속 좁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 ‘나 아기 낳았어.’하고 문자를 보낸 대학 친구에게 ‘고생했어.’하는 답문 하나만 보내고 그 후로 연락을 끊을 줄은. 

그 친구와는 결혼 전 막역한 사이였다. 당일 저녁에 전화해도 바로 내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다음 날에는 아침도 내어 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내치다니. 왜 그랬을까. 

하율아, 오늘은 애가 처음으로 뒤집었어. 오늘은 기어 다니기 시작했어. 애가 일어섰어. 어머, 너무 감동이야. 애 때문에 천 번 힘들다가도, 웃는 거 하나 보면 다 풀어진다니까. 너도 낳는 거, 한 번 생각해 봐. 마치 인생을 다시 사는 것 같아. 엄마가 날 이렇게 키웠을까, 생각하면 엄마한테 그동안 못했던 거 너무 미안해지고. 결혼하고 나면 철든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이제 알겠어. 

친구의 카톡 프로필은 아기 사진으로 바뀔 것이다. 모두가 그러듯이. 대머리 아기. 귀엽다면서 내게 카톡으로 아기 사진을 줄이어서 보낼지도 모른다. 제발, 그러지 말아. 너한테만 귀여운 거야. 그런 말은 차마 못하고 그냥 받을 수밖에 없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넌 갑자기 내게 푸념을 늘어놓겠지. 네가 너무 부럽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집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오늘은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남편은 도와주지도 않고. 밤에는 지 혼자 잠자기에 바쁘고. 우리 그때 얼마나 재미있었니. 딱 하루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앞질러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생각해 지레 겁먹어 관계를 포기한 것이다. 이미 아이 이야기라면 이력이 나 있었다.   

동료들이 모이면 숱한 수다거리 중에서도 본인 아이들 이야기가 가장 으뜸이었다.  

“애만 없으면 날라 다닐 텐데.”

“애 때문에 못하는 게 너무 많아.”

“남의 애들 보느라 정작 우리 애들은 신경도 못 쓴다니까.”

그러면서 넌지시 묻는다. 

“하율 씨는 언제 아기 낳아?”

처음엔 솔직히 대답했었다.

“저는 사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왜?”라는 물음표가 그들의 얼굴 위에 둥둥 떠다니는 걸 보고 내 대답을 후회했다. 

“그래도 애는 있어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해.”

“남편도 괜찮대?”

“아직 삼십대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등등의 훈계들이 이어졌다.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그런 일을 하도 겪다 보니 아직 신혼이니만큼 아이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게 그나마 편했다. 그렇다고 훈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나마 훨씬 듣기 나았다. 

“애는 젊어서 가져야 여자가 편한데.”

“나도 애가 잘 안 들어서서 고생했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 포기했을 때 딱 생기더라고.”

아, 그렇게 좋으면 많이들 낳으세요, 그리고 아기 낳아서 지긋지긋하다, 그런 말씀들은 제발 마시고요.  

이런 상황에 시달리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는 친구의 말도 달갑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시달릴 일이 눈에 그려졌다. 물론 친구가 내게 아기 고문을 할 것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먼저 봉쇄 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내 인간 관계는 결혼을 하고는 마치 바늘구멍같이 되어 버렸다. 실제적으로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내 편에서 절로 멀어져 버렸으니까. 

친구들이 하나 둘 아이를 가질 즈음 나는 불거진 남편과의 갈등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애정 표현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싶을 만큼 남편은 결혼 전과는 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키스하기, 회사에서 돌아오면 안아주기, 저녁이면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 나누기, 잘 때 팔베개 해주기, 주말이면 근교로 놀러가기 등등이 결혼 전 배우자에게 기대하던 바였지만 여기서 지켜지고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딩크를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였던 ‘서로만 바라보며 살기’는 무참히 깨지고 있었고 남편은 남편대로 이런 일로 삐치고 서운해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신혼이었던 나는 그런 갈등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일체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밖에서는 ‘나는 행복한 결혼생활 중이에요.’를 연기했다.    

미혼 친구를 만나 ‘누구를 만나서 결혼할까?’가 대화 주제로 들어서면 늘 “우리 남편 같은 사람 만나” 하고 말했다. 

“남편은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성실한 게 최고야. 요리는 어찌나 맛깔나게 잘하는지, 내가 가끔 요리해 줄때마다 미안스러울 정도라니까.”

그건 정말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사실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을까. 

“남편은 너무 성실해서 여름이면 밤 열두시 후에야 집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 너 알지? 학교 끝나자마자 학교 뒷문에 대기하던 우리 남편. 그건 그때뿐이었단다. 지금은 저녁에 얼굴 보기도 힘들어. 밥 먹고 게임하느라고. 음식에다가는 MSG를 얼마나 처넣는지. 저녁에 차 한 잔은 개뿔. 아침이면 데면데면 일어나서 가기 전에 키스도 안 해주고, 집에 돌아와서도 이야기도 잘 안 해. 주말엔 잠만 자고. 맘에 드는 거 하나는 성실한 거하고 술 담배를 안 한다는 점이야. 미칠 거 같아. 결혼 망한 건가? 나 어떻게 하지?”

이런 이야기를 누구와 하겠는가? 아무도 없었다. 아이를 낳은 친구와는 내가 선을 그었고 미혼 친구에게는 어두운 이야기나 해가면서 질질 짜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난 혼자였다. 

속 이야기를 편히 나눌 친구 하나가 없었다. 

지나고 보니 난 아마도 그때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우울증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혼자. 

혼자. 

그리고 또 혼자. 

결혼 후 약 팔년간을 그렇게 혼자 지냈다. 

나를 사막의 선인장이라고 착각하며. 

선인장처럼 가끔씩 오는 비로 혼자 살아갈 수 있어, 하고 오기를 부리면서.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난 강인한 선인장이 아니었다. 과실나무 한그루였다. 사방이 가시로 뒤덮인 네모난 벽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과실나무. 

목이 마른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물을 뿌려줄 누군가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사실을 정신과 약을 먹으며 가시가 사라지고 벽이 점차로 해체되면서 벽 밖의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고야 알게 되었다.      

이전 11화 엄마,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