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기술하거나 서술하는 글쓰기.
감정의 흐름이나 사물, 현상을 묘사하는 글쓰기.
글은 쓴 사람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한다. 나는 논지를 전개하는 논설문이나 설명문, 혹은 세심한 묘사가 가득 들어간 소설과는 최근 몇 년간 담을 쌓고 지냈다. 빠르게 뱉어내는 짧은 글들을 주로 써왔다. 그러한 글을 쓸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사람들은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을 선호할 거야."
그게 아니었다.
나의 호흡이 짧았기에 글도 짧았던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작년 초, 하루에 삼십분씩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행했던 적이 있다. 삼십분이란 한 글을 완성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삼십분 안에 하나의 글감으로 글을 완성하고 끝내 발행이라는 버튼을 눌러야지만 속이 편했다. '나는 삼십분 안에 한 글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속으로 으스댔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다.
한 글감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서서히 그 생각을 전개해 나가기를 마치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세심하게 해나갈 마음의 힘이 없었던 탓이다. 그때의 나는 글쓰기에 필요한 마음의 체력이 너무나도 약했다. 흙 안에 묻혀 있는 고미술품을 발굴할때 수만번 조심스럽게 붓질을 해가듯 내면의 흐름과 생각을 글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덩어리, 혹은 단어로만 존재하는 개념을 호호 불어가며 대략의 모양을 만든다. 머리 속에는 완성된 어떠한 상이 있겠지만 거기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직은 뭉툭한 덩어리들을 계속적인 손놀림으로 조금씩 다듬어 가야한다.
이 시간을 견디어 내려면 참을성과 인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
마음이 차분해야 이 과정을 견뎌낼 수 있다. 설령 자신의 성난 파도와 같이 널뛰는 마음을 기술할 때도 글쓰기의 마음이란 태풍의 눈처럼 절대 고요를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술이란 걸 할 수가 있고 설득력 있게 설명을 전개해나갈 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의 근육이 너무나 약했다. 나의 약한 근육으로는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시나 논증을 통해 서서히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장시간의 레이스를 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바튼 숨을 쉬어가며 겨우 마칠 수 있는 짧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년간 어떤 계기를 통해 결과적으로 나는 마음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 그 계기이다. 그 전의 나는 늘 마음이 불안했고 중심을 잡지 못해 방황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고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긴 글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브런치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긴 글은 생경할 것이다. 그동안 늘 짧은 글만을 써왔기에.
조심스럽게 꿈을 꿔 본다. 어쩌면 나는 다시 소설이란 걸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조각칼로 살살 긁어가며 등장 인물의 내면과 캐릭터를 다루는 일을 이제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마음의 힘을 조금은 갖췄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기분좋은 기대로 시작하는 24년 새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