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작가
어느 여름의 만남을 생각하며
낭만적 망명을 계속 읽고 있다.
이런 책은 단숨에 읽어지지 않는다.
한 작가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그 책들을 찾아 읽고픈 마음에 비평집은 일단 멈춤이 되니까.
그렇게 틈틈이 김애란, 서경식의 보유하고 있는 많은 책들 중 몇 권을 읽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서 이런 연휴의 고독의 시간이 얼마나 내게 큰 선물인지를 안다.
새들도 가끔 특별한 떼창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의미 가득한 후렴을 반복한다.
내가 암기력이 뛰어난 머리라면 들어봤던 저 새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머리와 체력만 좋았다면 세속적인 성공도 좀 했을 텐데 말이다.
체력이 급감할 때 제어되지 않는 감정이 많이 나오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감정이 나빴다는 것만 기억하지 자신이 상대에게 어떻게 했다는 것은 애초에 없던 일까지 되기도 하니까.
지금 그날을 생각하고 있다.
김도언 시인이 책방에서 시평 프로그램을 목요일마다 해주었고 김도언 시인과 친한 고종석기자님이 책방에 왔었다. 준비할 수 있는 술과 안주를 드셨고 추가로 편의점 와인과 맥주를 더 사 와서까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다음 날 좋은 시간이었고 종종 오시겠다는 문자를 부러 주실 정도로.
나 또한 평소 좋아했던 작가이자 그 냉철한 성찰의 글에 빠져들곤 했으니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평소 글로만 만났던 나는 질문을 하나 했다. 이제까지 쓰신 글 중에 딱 하나만 꼽는다면 어떤 글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 후로 그 제목을 잊었다. 냉철하고 균형 감각이 있다고 믿었던 기자가 그날 극찬하는 사람은 김도언 시인이었다.
그 후로 페이스북 친구도 먼저 신청을 해주었고 책으로 만난 느낌과는 다른 다소 편향된 글들을 읽게 되었다.
나는 2018년 이후 그 어떤 쪽의 확고한 지지가 없는 무당파가 되었다. 그러기에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떤 현상인지는 나만의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또는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없을 때는 늘 유보하는 편이다.
그러기에 정치적 성향, 표현의 자유는 내게는 들판의 바람에 부유하는 이파리처럼 아직은 긁어모으지 못한 배경일뿐이다.
내가 그런다고 세상은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김훈 <하얼빈> 독후감을 쓰고 터무니없이 차단당했다.
내게는 참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을 뿐인 글이다.
김훈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배척한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었고 나는 차단당했다.
너무 시시했다. 나는 착각했던 것이다. 글이 아름답다고 해서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런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권성우 교수님의 책 < 낭만적 비평 > 속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을 읽으니 그때 기분이 수면 위로 떠올라 오늘은 독후뒷담이다.
작가를 만나기 전 읽었던 글만 생각한다면 전혀 어긋나는 내용이 없다.
그래서 문제다. 사람을 안 만나야 좋은 경우도 있다. 아니면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하기도 한다.
내가 지금 레미제라블을 보면 또다시 생각이 바뀐 것처럼.
그때 그 기분을 말 한 번 못하고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었던 그 일을 남겨본다.
내 40대는 그런 시간들이 너무도 많았다. 세상을 아름답게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성찰과 통찰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이 듦이란 바로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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